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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Bravery-무용- 2022. 2. 16. 12:17

책명;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

저자; 파스칼 브뤼크네르(프랑스)

<프롤로그>

-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19세기에는 젊음이 출세의 걸림돌이 되어 실제보다 더 나이를 들어 보여야 해서 청소년기부터 겉늙었다. 수염이 더 빨리 자라기 위해 매일 면도를 했고 금테 안경을 썼고 불편한 예복을 입고 배가 나오게 하였다. 그때는 그래야 진중한 사내로 통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세대나 저 세대나 어르신처럼 살았지만 지금은 어르신이 애들처럼 살고 싶어 한다.

40대 키덜트(*어린이 Kid와 성인 Adult의 합성어*) 어린이 같은 어른, 오춘기, 섹시한 60대, 70대 싸움꾼.

킥보드, 인라인스케이트, 전동 킥보드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 몸에 딱 붙는 정장 차림. 반바지 차림으로 쏘다니는 희끗희끗한 늙은 개구쟁이. 시대가 거꾸로 됐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30세까지 자기는 늙지도 않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느낀다. 늙는다는 것은 달력 속으로 편입되는 것,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이는 세월을 공감하게 하지만 세월을 비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내가 꼭 그 나이인 것은 아니다. 서류상의 내 나이와 스스로 느끼는 내 나이 사이의 간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는 이 간극이 너무 크다.

 

이제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여러 번 살 권리를 요구한다. 나이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요 나이 때문에 사람이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 나이로 보이고 말고 가 없다. 나이는 수많은 변수 중 하나일 뿐이다. 노인은 자기가 애인 줄 알고, 청소년들은 술을 사거나 클럽에 들어가려고 신분증을 위조한다. 인간 조건은 여기저기 금이 갔고 우리는 정체성과 세대가 유동적인 시대에 진입했다.

지금은 속박에서 벗어나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을 잘 활용하여 새로운 삶의 기술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베이붐 세대는 자기네가 걸어갈 길을 스스로 닦는 개척자다. 이 세대는 한창때 젊음을 재창조했고 지금은 노년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심리학 나이가 생물학적 사회학 나이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용맹하다.

 

이 책은 지적 자서적이자 선언문으로서, 인생의 기나긴 시간이라는 한 가지 문제만을 다룬다. 우리는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이 중간 시기를 살펴 볼 것이다.

 

인생의 계절에서 가을에 새봄을 꿈꾸고 겨울을 최대한 늦게 맞이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 

***프롤로그에 쓰여있는 글에서 발췌하여 옮겼습니다. 나이 듦의 새로운 태도를 제시한 책이기에 책을 읽으면서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좋은 내용이 있으면 수시로 옮겨보겠습니다.***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

-포기를 포기하라- (인생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 그저 살날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에 출생 시기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과 기준을 간직한 채 지구상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한 세기를 살면서 두 번의 세계대전, 냉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경험한 사람과 스마트폰, 태블릿 피시를 끼고 첨단기술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요즘 아이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그대로인 것은 신분증뿐 아닌가? 연대기들은 서로 뚜렷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충돌하고, 저마다 기준으로 삼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가장 나이 많은 세대와 가장 어린 세대 사이에는 정말로 번역의 문제가 불거진다. 그들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양립 불가능성은 무너졌다. 지금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다. 일례로, 한 사람이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자 증조할아버지일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므두셀라<창세기에 969세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인물>인 셈인데, 그것도 아주 원기 왕성한 므두셀라다. 남성은 75세까지도 생식 능력이 있으므로 손자 볼 나이에 아이를 하너 더 낳을 수도 있다. 고모나 삼촌이 조카보다 마흔 살 어릴 수도 있고, 형제라 해도 첫째와 막내의 나이가 쉰 살이나 날 수 있다.

영미권에는 “오늘은 당신에게 남은 생의 첫날입니다" 라는말이 있다. 남은 생은 첫날부터 시작이지만 그때는 풍성해 보여도 이내 쪼그라든다. 플라톤은 사랑(에로스)이 빈곤의 여신과 풍요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시간도 그런 것 같다. 무르익어가는 시간 동안 비옥한 기다림이 꽃을 피우지만 고갈과 마모도 시간의 산물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정되어 있고 하루하루 선택지가 줄어드니 분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때 아닌 '오춘기'가 더 이성적인 태도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 시인 클로드 루아는 절묘하게도 “인생이 문장을 끝맺지 않는 법”을 말했다. 끝을 딱 맺지 않고 반쯤 열린 문처럼 내버려두는 편이 인간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닫아주고 마침표를 찍어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우리 팔자가 어쩌니 저쩌니 떠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29쪽 까지- 2022. 2. 21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3)

-포기를 포기하라-(차가운 물벼락) 30쪽
과학 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쌩쌩한 30대, 40대의 외모와 건강 상태로 살게 해준다면, 혹은 우리가 선택한 연령대로 살아가게 해준다면, 그게 진짜 기적일 것이다.

 

사는 만큼 병도 오래앓는다. 건강한 상태에서의 생존 기간은 그렇게까지 늘지 않았다. 의학은 장애와 치매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되었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노화의 슬픔을 부정하거나 노화를 없앨 수 있다고 약속하는 부조리까지 범하지는 말자. 우리의 대단하고도 가소로운 힘은 노화를 늦추고 손상을 줄일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미래는 아직도 가능해, 내가 따라준다는 조건에서 말이지. 너희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의학에서는 사람이 45세가 넘으면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발사를 늦추느냐 방아쇠를 당기느냐는 그 사람에게 달렸다. 물려받은 신체를 살아온 신체, 유지된 신체와 구분해야 한다. 45세 이후의 연약한 신체는 자질구레하게 손볼 데가 많다. 고장 났지만 가까스로 수리해서 다음 사고가 날 때까지 몰고 다니는 근사한 구형 세단 같다.

어느 순간 이 병 저 병 전전하며 건강에 대한 환상이 부서지는 때가 온다. 치료는 점점 느려지고 회복은 점점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이때는 어느 한 가지 중병으로 고생하기보다는 자잘하게 골고루 앓는다.  2022. 2. 24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4)
-포기를 포기하라-(생의 마지막 날까지 도전하기를) 36쪽

남은 시간이 줄어들면 사기라도 높여야 한다. 오늘날의 50대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생아와 상황이 비슷하다. 300여 년 전에는 유럽인의 평균 수명이 30세 남짓이었으니 둘 다 앞으로 30년은 남아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예측이 되레 삶의 의욕을 부채질한다. 나이가 차츰 무서운 판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수준 이상 나이가 들어도 퇴물이 되는 기분은 덜하다. 요즘은 50세가 넘었다고 해서 벤치에만 앉아 있지 않고, 꾸준히 모습을 보이거나 노인 차별에 맞서 싸우니 다행이다. 지금은 노인들도 계속 조명을 받기 위해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지않기 위해서 부단히 싸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미 해답을 얻었거나 발견한 단계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나이 든 사람은 으레 다알고 이해하려니 한다. 1960년에 말리 출신 작가 아마두 앙파테 바는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고 했다.

인생의 가을은 언제나 모순적으로 정의되어왔다.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끝없는 겨울잠 속에서 쇠락해가는 슬픔이 있다. 오래 사는 것이 본인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의학의 발달때문인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옛날에는 오래 사는 사람이드물었으므로 후광이 비쳤지만 이제는 노인이 너무 흔하다. 자기 위상을 규정하거나 운명의 주기를 지정할 수 없는, 부유하는 노년 말이다. “인생의 찬란한 6월을 놓치지 말라"고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말했다. 하지만 9월, 10월, 12월도 해가 좀 덜 나서 그렇지 근사하기는 마찬가지다.

원래 노년은 평정심의 시간이었다. 손자의 일이라면 뭐든 이해하고 용서하는 애정 넘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간. 이 시간에 군더더기는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다. 신체의 수분이 빠지고 가장 중요한 것, 정신의 위대함과 영혼의 아름다움만 남는다. 생은 점점 감퇴하고 불꽃 하나만 남지만 바로 그 고고한 불꽃이 만인의 존경과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노년은 지상의 즐거움을 탐하는 자세에서 차츰 벗어나 명상과 연구에 몰두하고 지혜의 말씀으로 신탁을 전하며 저승길을 준비하는 시간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요즘도 그러한 내려놓음이 일부에게는 먹힐지도 모르겠다. 사실,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본질을 지키고 싶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일단, 나이가 들었으면 포기하라든가, 어차피 노년에는 욕망이 감퇴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버려라. 결국은 노년이 우리를 제압하고 수용하겠지만 그래도 노년은 재건의 대상이다. 엎드려라, 포기하라, 라는 강요를 거부해야 한다. 고전적인 지혜는 사실 체념과 다르지 않았다. 삶이 척박해지지 않도록, 이름은 거창하지만 결국 요양병원과 다르지 않은 시설에 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

말년은 평온해야겠지만 체념하고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두 가지 지혜 사이에서 갈등한다. 유감스러워도 불가피한 것에 동의하는 지혜, 가능한 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지혜. 우리는 그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우리에게 생년월일을 지정해주는 것은 행정 서류다. 나이는 생물학적 현실에 기댄 사회적 관습이다. 관습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 물론, 결국 우리는 쓰러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패배를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다. 2022년 2월 26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5)

자리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나는 은퇴를 원하지 않았다) 47쪽

원한을 사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60대 이상 노인들도 본인이 원한다는 전제 아래' 다시 일을 하는 것이다. 경험치와 통찰력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두터워진다. 노인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으면, 관계를 되찾고 봉사활동을 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활동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노인들을 빨리 꺼져야 할 기생충처럼 바라보는 편견도 사라질 것이다.

노동이란 무척 고된 것이어서 반복적 동작으로 닳아빠진 신체를 반드시 쉬게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은퇴가 '이중고', 즉 노쇠에 빈곤이 덮친 격이다. 경제 활동을 그만두면 소득이 줄고 “배가 고픈데 목도 마른 상황이 된다. 직업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60대부터 일을 할 수 없다면 강제 여가의 저주를 피하기 어렵다. 백발이 된 사람은 전부 놀이공원 같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건가. 그러한 여가 시간은 대개 자기계발보다는 허구한 날 멍청하게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용도로 쓰인다. 노년은 이 시각적 탕약을 필요 이상으로 들이켜기 십상이다.

60대부터 인생을 즐기겠다는 30대, 40대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진짜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아무리 바쁘고 제약과 장애물이 많아도 진짜 삶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여가조차도 과거의 사회생활에 대한 한풀이가 되어버린다. 정신과 신체가 끄떡없던 사람이 무기력한 생활을 몇 달 하고는 쇠약해지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작금의 전형적 사례는 이렇다. 남편은 65세라서 돈을 벌지 않는다. 아내는 대개 나이가 좀 더 어리므로 아직 경제 활동을 한다.


여론조사 기관들이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스트레스에 초연해지면서 행복을 가장 잘 느끼는 때는 70세라고 한다. 어쩌면 그 초연함은 그들이 이미 세상에서 벗어나 있어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70세에는 물질적 문제들에서 벗어나 40세 때보다 자기다운 충만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노동의 중단과 정신의 평온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연금 삭감과 일을 그만둔 후의 공허감에 시달리다가 거세게 들고 일어난 은퇴자들을 못 보았는가? 그러니 가난과 노쇠의 결합에 기쁨의 색을 덧칠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시몬 드 보부아르'는 50세 여성을 쓸데없이 여력은 있고 경제적으로는 자립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렸다. 해야할 일은 없고, 애들은 이미 다 키웠고, 할머니 역할은 아직 하고 싶지 않다. 기력과 시간이 남아도는데도 권태의 사막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야 할 기약 없는 나날을 관조하며 속삭였다.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아."자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같다. 한때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들 수 있다. 경력도 있고 실력도 인정받았는데 자기를 입증하는 데 혈안이 된 새파란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이유로 자격을 빼앗긴다. 평온과 휴식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분야에 남고 싶었건만 억지로 그만둬야 하니 사람이 피폐해진다. 사실, 자기를 실현하는 삶이란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휴식이 아니라 강하게 만드는 단련에 있다.

은퇴자는 사회의 눈에 한물간 사람으로 비칠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한창때라고 생각한다. 가정과 직업에서의 다양한 책임들 때문에 억눌렸던 자유가 매혹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은퇴자는 단순한 오락거리나 자원봉사 외에도 삶의 이유들을 찾아야 한다. 스웨덴처럼 직장인이 몇 년씩 안식년을 쓸 수 있게 하거나 경력 중간중간 쉴 수 있게 하는 식으로 '벤치 타임'을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스스로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생각해서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임시 유예는 강요된 휴식과 완전히 다르다. 은퇴제는 커다란 배려가 수혜자들에게 재앙으로 둔갑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2022. 2. 28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6)

자리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철학하는 나이) 52쪽

나이를 먹으면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뻔한 재앙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고행의 목록에 집착하다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인간은 점점 더 잘살게 되었고 점점 더 오래 살게 되었다. 조상들은 진작 죽었을 나이에 우리는 불안하나마 아직 큰 병 없이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살아 있다는 부조리한 기쁨이다. 뭐든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

20대 때는 대학 졸업장을 따느라, 취직을 하느라, 실력을 입증하느라, 초보 딱지를 떼느라, 애송이 태를 벗느라, 첫사랑의 아픔을 이겨내느라, 새로운 자유를 홀로 감당하느라 오히려 젊음을 누릴 수 없었다.

 

젊음에는 아름다움, 역동성, 호기심이 있지만 아직은 흉내나 내는 나이, 더듬더듬 나아가다 넘어지고 유행과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성숙기에는 실무 경험이 있지만 쾌활함이나 활력은 떨어진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장점과 단점을 마주하는데 얄궂게도 그것들은 아귀가 딱딱 맞지는 않는다.

서양에서 삶은 딱 한 번이다.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만회할 수 있는 보충수업이 없다. 그 두 종교는 카르마karma라는 개념에 따라 시험적인 운명을 고안했다. 이번 생에서 우리는 전생의 과오를 갚는다. 그렇게 생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미약함을 정화하다가 열반에 이른다. 동양은 '생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고, 서양은 생 안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동양에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구원이고, 서양에서는 동일한 시간 동안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교도는 영생을 걸고 단판 게임을 하고 힌두교도는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혼이 정화될 때까지 윤회라는 긴 게임을 한다.

 

노년기가 오늘날처럼 철학을 하는 나이, 특히 정신의 나이였던 적은 없었다. 이 시기에는 칸트가 정의한 인간 조건의 모든 도전 과제가 날카롭게 다가온다. 나는 무엇을 바라도 되는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었는가? 인생의 인디언 서머는 과연 “영혼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영원한 시험의 상태다. 이 시기에는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을 번갈아 누릴 수 있다. 가면이나 눈가리개 없이 실존의 비극적 구조를 직시하는 이 시간은 일종의 한계 상황이다.

 

삶이 끊임없이 배움의 조건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재능을 부각하는 것이 젊음의 소관이요, 그래서 존재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바쁘다면 노년 역시 막다른 길이 아니라 자기 양성의 최종 시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의 파괴력은 역동성을 제한하기는 하지만 아예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우리는 늘 인생 학교의 나이 든 학생으로 남을 수 있다. 스스로 배우려는 이 의지가 생생한 정신의 표시다. 새로운 앎은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되리라. 우리는 가르치는 즐거움과 배우는 즐거움을 다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수업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설명하는 입이자 질문하는 입으로서 완벽한 상호성을 이룬다. 우리는 아직 다시 한번 세상에 우리를 내놓고 배움에 몰두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완성됐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완전하다. 진짜 삶은 없다. '진짜' 삶은 없고 단지 아직도 탐색할 수 있고 흥미로워 보이는 길들이 있을 뿐이다.  2022년 3월 2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7)

자리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인생의 마지막 사춘기) 56쪽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걷는 앞세대를 보며 두려워한다. 앞선 자들은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 몸소 보여주었다. 반쯤 기계인 존재, 사이보그라고 해야 할까. 50세가 넘으면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안경, 보청기, 심장 박동 조절장치, 판막, 임플란트, 다양한 종류의 전자칩을 달고 산다.

은퇴자 중에도 건강 보조제로 자기 몸을 챙기는 등 젊은이보다 더 질병에 강한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중산층 이상에 해당하는 이들은 이전 세대 같으면 병석에서 골골댈 나이에도 여전히 거뜬한 신체로 팔팔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다른 한편, 체념한 채 그저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은퇴자들도 있다. 정신과 마음의 혼란은 언제라도 남녀 상관없이 덮칠 수 있다. 비아그라와 여성 호르몬 치료의 등장은 강건한 60대들에게 도취를 선사했다. 성욕의 부재에서 비롯된 평화는 깨졌고, 여성들은 때때로 더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혼후 순결을 깨고 다시 성생활에 돌입했다가 결국 아내와 갈라서게 된 남편이 얼마나 많은가? 68혁명 세대는 기적의 알약을 두 알 받았으니 하나는 피임약이고 다른 하나는 혈관확장제(발기부전제)다.
머리가 하얗게 센 세대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사위를 굴리고, 운동과 여행과 노동과 육체적 향락에 뛰어들려고 욕심을 부리는 까닭은 개인의 시간 계획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유럽 여성의 평균 초산 연령은 30세에 육박하고 '완경은 장차 60세 이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감격스러운 전망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인들이 주책맞게 뭔가를 시도하고 계속 일하려고 욕심을 부린다는 비난은 그들에게 미리 사망을 선고하고, 나아가 언젠가 노인이 될 자기 자신에게도 미리 사망을 선고하는 짓이다.

우리는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는 동안 그 선물은 권리로 변하고, 우리는 최대한 오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한다.

 

우리는 피터 팬처럼 어른이 되기 싫은 어린이, 늙기 싫은 늙은이다. 우리는 혈기 어린 탈선을 하며 생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젊은이들은 20세부터 동거를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들은 가벼운 연애를 즐긴다. 나이를 먹는다고 철이 들지는 않는다. 늦바람이 죽을 때까지 갈 수도 있다. 중년 이후의 주책맞은 애정행각이 우습거나 추접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서히 무덤이나 소독약 냄새 나는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관습에 도전하는 것보다 짜릿한 게 있을까?

관건은 이것이다. 이 새로운 시기는 또 다른 모습의 성숙기인가, 기력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작열하는 사춘기인가? 아마 그 두 상태가 긴장을 빚어낼 것이요, 필시 분열이 있으리라.

 

노화를 늦출 방법은 욕망의 역동성 안에 머무는 것뿐이다.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화해시키자. 낭만주의와 느긋함을, 뻔뻔함과 주름살을, 백발과 기꺼운 감정의 폭풍을.

우리는 인간 조건의 불행을 해소할 수 없다. 단지 동굴 속에서 희미한 한 줄기 빛을 엿볼 뿐이다. “17세에는 진중하지 않다”고 랭보는 노래했다. 하지만 50세, 60세, 70세가 넘어도 겉보기에나 진중할 뿐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 나이에서 황폐한 장식을 벗겨내고 노년을 유머와 멋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한계는 밀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생은 어떤 단계에서는 불가역성에 반발할 수 있다. 심연으로 가라앉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그럴 수 있다. 2022년 3월4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9)

루틴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66쪽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 트리에스테의 *금리생활자*이자 골수 애연가인 제노(이탈로 스베보가 쓴《제노의 양심의 주인공 - 옮긴이)는 기침과 가래에 이골이 난 나머지 건강에 집착한다. 그는 의사와 정신분석가를 만나고 치료소에서 전기요법까지 받으면서 담배를 끊으려 애쓴다. 하지만 다시 담배에 손을 대고 만다. “마지막으로 피우는 담배라고 생각하면 더 맛있다.” 제노는 마지막 한 개비에서 또 다른 마지막 한 개비로 넘어가기를 54년간 거듭하면서 우울하지만 재미있는 결론을 내린다. “내 인생은 이런저런 반복들이다.”
*****금리생활자(金利生活者);1.다른 직업 없이 주식 배당금, 채권, 은행 예금, 고리대금 따위의 이자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

2.집세, 땅세, 연금 따위의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  2022년 3월 9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1)

루틴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78쪽

하루하루가 완전한 인간 극장이다. 하루는 삶을 잘라내 보여주는 상징체계다. 눈부신 새벽, 의기양양한 정오, 수고로운 오후, 차분한 황혼을 보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일상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작은 부활이다. 아침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밤이 앗아간 기운을 돌려받는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은 여전히 우리 삶의 리듬을 구획 짓는다. 날씨가 화창하고 흐리고에 따라서 기분이 널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대우주와 우리 인간이라는 소우주는 연결된다.

신체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날씨는 부분적으로 우리의 기쁨과 번민을 좌우한다. 빛은 우리를 경쾌한 기운으로 채우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개인적 징벌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해는 매일 아침 선물을 한아름 안고 떠오른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면 세상에 첫걸음을 떼는 기분이 든다. 눈을 감고 잠들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새벽이 눈부신 빛으로 솟아오르려면 어둠이 필요하다. 힘든 날들은 지나간다. 우리는 1년에 365번이나 그런 날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우리의 24시간은 매일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한 주를 통과하는 과정일 뿐이고, 또 어떤 날은 얼른 도망치고 싶은 감옥 같고, 어떤 날은 만물의 아름다움을 향해 활짝 열린 창처럼 눈부시다.
잠은 이런 면에서 망각과 소생의 놀라운 상징이다. 잠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난 느낌을 준다. 푹 쉬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볼 때 드는 그런 기분은 착각이지만 좋은 자극이다.

 

니체는 우리가 영웅처럼 매일 저녁 황혼에 죽고 이튿날 다시 나타난다고 했다.
좋은 것들의 영원회귀, 이를테면 삼시 세끼라는 기본적인 문화는 그 자체로 즐거움의 원천이다.

 

과로는 시간을 투입해 시간을 만회하려는 의지다. 할 일을 쌓아놓고 벼락치기로 처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른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능력, 이 무심한 한가로움이야말로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음의 특권이다. 그것이 젊음의 재능이자 경박함이다. 2022년 1월 14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2)

루틴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황혼은 새벽을 닮아야 한다.) 88쪽

모든 것을 보고 겪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을까? 이제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다시 시작하기를 허하였으니 언제고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된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생은 계속된다. 섬뜩할 만큼 단순한 이 문장이 행복하게오래 사는 비결일 것이다. 진짜 삶은 영웅적이거나 기상천외하지 않다. 삶은 아주 세속적이고, 별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욕구를 느끼거나 해소하는 식으로 흘러간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기 위해 우연을 선택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운명은 끝까지 유연하게 잘 구부러져야한다. 시간은 아마도 우리를 차츰 약하게 하고, 우리에게 똑같은 요리를 다시 대접할 것이다. 이건 희소식이다. 어떤 바퀴가 우리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깔아뭉개지 않으니 한번 실수했더라도 다시 나오는 갈림길이나 교차로에서 바로잡으면 된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기회라도 잡은 사람이 옳다. 부활은 이승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늘 시험 삼아 살아본다. 삶은 무엇보다 일종의 실험이다. 삶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쭉 나아가는 게 아니라 에둘렀다가 확 질러가고 똬리 속에 이전의 과정을 품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간도 각기 다르고 치열함도 각기 다른 삶의 시기들을 거친다. 모든 실패는 새로운 시도의 도약대다. 행복한 삶은 불새와 비슷해서, 자기에게 맞서 일어나 주어진 바를 태우고 그 잔해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한다.

삶이 어느 시점부터 좀 더 예측 가능해진다고 해서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재발견도 첫 발견처럼 흥미롭고, 이미 겪은 감각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청소년기에는 부모와 닮은 구석 없이 저 혼자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황혼의 인디언 서머는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기의 딜레마를 재연하는 면이 있다. 창조적인 신념, 만들어진 미덕,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의 어질어질한 망설임이 자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황혼은 새벽을 닮아야 한다. 비록 그 새벽이 새로운 날을 열어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2022년 3월 16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3)

-인생은 부조리하고 멋진 선물- 95쪽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자기 시대를 언짢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사람들은 살날이 줄어들수록 삶에 대한 혐오가 깊어진다. 감히 자기를 떠나려 하는 삶이 괘씸해서 밟아줘야 분이 풀린다. 그들은 어차피 물러날 사람들이니 인류의 모험은 끝났고 시대는 가증스러우며 후세는 어리석고 무식하다는 악담을 퍼붓는다.

노년은 으레 노망과 저주라는 이중의 함정에 빠진다. 트집쟁이, 투덜이, 꼰대가 우리 안에서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당장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런 병을 “영혼의 주름”이라고 불렀다. “늙어가면서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은 없으며, 있다 해도 몹시 드물다.

우리는 나이를 먹되 마음이 늙지 않게 지키고, 세상을 향한 욕구, 기쁨, 다음 세대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해야 한다. 괴팍한 노인은 즐거워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친구와 지인, 사시사철이 다 마음에 안 든다. 사회가 추하다고 보지만 정작 추한 것은 그의 눈이지, 그 눈이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노인들은 세상이 망할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세상을 아쉽지 않게 떠나고 싶어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보다 오래 남을 것이요, 젊은이들은 그들의 저주를 아랑곳하지 않으리라. 쇠퇴론은 개인 모두에게 주어진 팔자, 즉 노쇠와 죽음을 인류사에 적용한 것일 뿐이다.

노년은 특히 영적 나태의 시간이다. 그리스도교의 은둔 생활을 하는 고행자들도 이 병에 걸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법열에 빠지기는커녕 구원에 무관심해지고 우울해하다가 결국 은둔 생활을 접고 경박한 세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세상으로 돌아갈 기력이 없다. 그는 자기 팔자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음울한 희열을 느낀다. 그의 영혼을 부식시키는 안개는 죽어야만 걷힐 것이다.

50세, 60세, 70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 30세, 40세 때와 똑같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매섭게 군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고, 어느 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 어느 나이에나 삶은 열의와 피로의 싸움이다. 인생사는 그저 부조리하고도 멋진 선물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서/ 누구인지 모를 자로서 살며/ 언제인지 모를 때 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데도/ 나 이토록 즐거우니 놀랍지 않은가. -마르티누스 폰 비버라흐(16세기 독일의 성직자)- 2022년 3월 19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98쪽

어느 세대나 자기가 이전 세대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성년에 진입하고, 이전 세대를 경멸 혹은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이 든 부모와 선생 들은 거추장스러운 잔해 같다. 그 맹한 노인네들을 그냥 싹 치워버렸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은 당장 그들을 추월하고 싶어 안달이다. 어른들은 반대로 어린 것들을 아무리 가르쳐도 개념 하나 못 배워먹는 야생아 취급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우릴 아예 지워버리려고 해. 벌써 우리랑 맞먹는단 말이지!

세대 중에도 결정적 세대와 중립적 세대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세대, 알제리 전쟁과 68혁명 세대, 반전체주의 세대가 어떤 식으로든 시대에 획을 그었다. 각 세대가 간직한 진실은 반박에 부딪힌다. 젊은이들은 지금의 문제가 전부 이전세대 탓으로 보이니 나이 든 사람들을 다 치워버리고 싶을 만도 하다. 아니면, 이전 세대를 시샘하고 그들이 이상을 저버렸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부모나 교육자는 두 가지 가르침을 전한다. 첫째는 공식적인 가르침, 대놓고 설파하고 옹호하는 원칙이나 가치관이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기도 모르게 생활 태도나 인간관계에서 풍기는 두 번째 가르침이 공식적인 가르침과 정반대일 수도 있다. 부모는 모두 원하든 원치 않는 자식에게 닮음을 전달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싫어했던 아버지, 우스꽝스럽거나 가증스러워 보였던 어머니를 결국 닮게 된다. 그들의 괴벽이 우리에게 옮아오고 그들의 고약한 말버릇, 자주 쓰는 표현이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이 말을 놓는데 그들은 존댓말을 쓰고, 나이 든 사람이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는데 그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상처받는다. 젊은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할 때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그건 이미 우리가 별도의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친해지고 싶은데 그들은 거리를 둔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리에 돌려놓는다.

아들이나 딸 중 하나가 손위 동기들과 크게 싸우고 틀어졌다가 나중에 화해하고 다시 한마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은 혈기에 삐뚤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할까. 그들은 한때 떠났지만 비판적인 눈으로 세계관을 풍부하게 키웠으니 그러한 탈선도 거대한 시간의 사슬로 돌아와 개인을 초월한 계통의 한 요소가 되는 과정일 것이다. 명백한 거부가 있었음에도 연속성은 그처럼 신비롭게 이어진다. 유산의 부정조차도 유산의 은밀한 연장이었던가. (2022. 3. 21)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5)

-시간- 104쪽

오늘 밤 자다가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 발 뻗고 잠들지 못한다. 그러한 명령은 실제 경험과 괴리된 간결성의 독단론에 입각해 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낙관하지 않으면, 아직은 시간이 있고 상황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그날 밤 관에 들어가 눕듯 침대에 누울 수 없을 것이다. (2022. 3. 23)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6)

시간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106쪽

당장 죽을 것처럼 매 순간을 살아라

"하루하루를 삶의 완성처럼 살아라'라는 말은 그만큼 현명하게 살라는 뜻이지만, 최대한 즐기면서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처음 보듯 바라보고 처음 사는 듯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듯 보고 마지막으로 사는 듯 살아야 한다. 일단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생을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는 재화처럼 여기고 지금 당장 누려야 한다.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섬광 같은 순간,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훔쳐낸 순간이다.

어느 나이에나 잘 사는 법에는 상호 보완적인 두 제안이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은 날과 시간과 기회를 붙잡는 기술이다. 또 다른 제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적인 계획을 품는 것이다. 매 순간이 결정적이고, 매 순간은 지나가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즐겁게 살 수가 없다. 기쁨, 사랑, 우정은 공동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가치가 있을 뿐이다.

몽테뉴는 플라톤을 따라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사라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그 불길한 일을 강박적으로 떠올린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어디 있을까. 평생 죽음을 연습하여 어느 날 갑자기 큰 낫을 든 죽음의 신이 찾아와도 놀라지 않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바니타스화yanitas (죽음의 필연성과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상징을 활용하는 회화 장르 - 옮긴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골을 마주하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삶을 그 끝에 대한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 메멘토 모리mementomori(죽음을 기억하라)만큼 인생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또 있을까?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의 지평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는 호기로운 아침, 눈부신 정오, 차분한 석양까지, 사람의 한평생과 닮았다. 또한 인생은 봄과 뜨거운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한 해와도 구조가 같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도 깨어날 테고 내년에도 새해 인사를 나눌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쾌락의 조건 중 하나는 무한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은 돌아오고를 원한다. '앙코르'를 원한다. 그것이 시간의 기약이고 모든 기약은 정상을 벗어난 면이 있다. 기약은 가능성을 뛰어넘어 말이 안 되는 방식으로 미래를 내건다. 우리가 그 환상에할 수 있는 동안은 소망이 있다. 100세 노인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내일을 말한다.

(2022년 3월 24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7)

시간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다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116쪽

시간의 여정이 거꾸로 흐를 때 생의 강물은 이따금 수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애늙은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젊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세상은 옛것이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는 새로움의 효모가 되어 그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한참 든 후에도,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면에서 점점 더 커가는 싱그러운 유년이 새로움을 불러올 수는 없을까. 여기서 말하는 유년은 실제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기질이다.

잘 산다는 것은 끝까지 갈마듦의 순리를 따라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부흥revival'이라는 종교적 현상, 신앙이 다시 활력을 얻고 새롭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년에게 배운다는 게 무슨 뜻일까? 60세, 70세가 됐는데도 20세 때보다 경험만 많았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요, 상황을 바로잡을 가망은 오히려 더 줄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시간의 연안에 헐벗은 채 떠밀려왔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순결한 눈, 놀라워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하는 늙은 어린애들이다.

어떤 면에서 아이들의 무지는 복되다. 쓸데없는 지식만 꾸역꾸역 머리에 처넣은 어른들의 애매한 앎보다는 철저하게 직관으로 가득한 그 무지가 나아 보인다.

 

아무도 다시 젊어지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의식을 풍요롭게 채울 수는 있다. 상반된 두 가지 성장이 맞부딪치되 어느 한쪽을 파괴하지는 않으면서 우리 안에 이로운 긴장 관계를 낳는다. 망가지기 쉬운 상태로 추락한다고 해서 사유의 깊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유는 자기만의 노선을 따라간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어린아이처럼” 살라고 했다. 생의 초년기처럼 살면서 늙어버린 자아의 한계를 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샘에 뛰어들라. 몸은 늙되 마음은 늙지 말라. 세상과 쾌락에 대한 감각을 지키고 걱정 많은 속내와 혐오라는 이중의 함정을 피하라.

인생에는 두 가지 유년이 있다. 첫 번째 유년은 사춘기에 우리를 떠나간다. 두 번째 유년은 성년기에 나타나 열정적으로 우리를 휘젓다가도 우리가 잡으려거나 흉내 내려고 하면 도망간다. 유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린애처럼 유치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정신의 청신함, 새로운 피를 공급받는 놀라운 계기를 의미한다. 요컨대 화석처럼 굳어버린 삶에 맞서서 다시금 경탄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자명해 보이는 것에 경이로워하는 능력. 그러한 능력은 나이와 상관 없이 자기를 보전하려는 바람, 이미 습득한 것에 안주하려는 태만을 이긴다.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는 "인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도 연습 중일 테고, 서툴게 한 음 한음 연주해낼 것이다. 몸이 불편한 자, 병든 자, 다친 자, 아픈자, 어리석은 늙은이에게 위대한 미래가 있을진저, 유년은 노년의 주책맞은 노망이 아니라, 다시 한번 최초의 순간에 흠뻑빠지고 싶은 자들의 보완책이 될 것이다. 때때로 젊은 사람이 겉늙은 것처럼 유년의 특징이 70대 노인의 얼굴에 새겨질 수도 있다. 어리석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으므로,  (2022. 3.28 )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8)
-할아버지 할머니가 24시간 서비스인 줄 아나- 125쪽

언젠가는 손주를 보고 기뻐하고, 빅토르 위고처럼 '할아버지로 사는 기술’, ‘어린이에게 복종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리라.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따뜻한 조언을 베푸는 수호자로서 혈통 속에 위치하며, 후손들의 얼굴에서 점점이 나타나는 닮음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이때는 어린아이들이 주는 이로움을 모두 즐기면서도 거기에 예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 삶의 미숙한 첫걸음을 다시 배우고, 50년 전과 교과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면서 즐거워하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좋은 성적을 받아오고 우리는 못했던 것을 해내며 집안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모습을 기특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손주 세대는 자식 세대와 달리 우리를 허구한 날 판단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비난을 퍼붓지 않는다. 손주들은 잠깐 떼쓰는 것조차 귀엽고, 손주 입에서는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 나와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더라도 갈등은 없다.

하지만 이 자애로운 권위가 60세, 70세에도 넘치는 에너지를 다 차지하거나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게다가 일종의 계승 역전에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라는 문제를 두고 아들과 딸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 손주 세대를 돌보는 일은 자식 세대의 허락에 달렸다. 자식들은 늙은 부모가 자기 볼일 보느라 손주를 봐주기로 한 날 안 된다고 거절하거나 유치원에 늦게 데리러 가면 난리를 피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24시간 서비스라도 되는 줄 아나. 그 세대도 별거, 재혼, 사생활, 여행 등으로 분주하기 일쑤요, 요즘은 그 나이에도 대학을 다닌다! 그래서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런 호칭이 뭔가 쉰내 나고 늙어버린 기분을 느끼게 한다나.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직접 부르기를 삼가거나 다소 귀여운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에둘러 가기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은 가변적이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이 역할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할아버지 할머니로만 살라는 법은 없다. 노년은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거나 그리운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함께 투쟁하고,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이 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보완적인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2022. 3. 30)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9)
-여전히 인생은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154쪽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안주하지 않고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일깨우는 남다른 이들을 우러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소설보다 전기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는 특히 크게 넘어져 쓴맛을 보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의 인생에 매료된다. 그들의 독특한 삶의 여정은 우리의 삶에도 의미와 모양새를 부여한다. 노년을 찬미했던 키케로가 옳았다. 통찰력 없는 자는 연약함과 권태밖에 보지 못하는 노년이라는 이 척박한 공간에도 범상치않은 이들이 있다. 저 나이가 되면 우리는 어떨까 궁금해서 그들을 열심히 분석한다. 본이 되는 사람은 철학의 모든 원리와 맞먹을 만큼 귀하다.
나이 듦을 생각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절벽처럼 생각하든가, 천천히 끝으로 나아가는 완만한 비탈길로 생각하든가. 물론 점진적 하강에도 기복은 있다. 어떤 노인들은 단순히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이유로 존경을 자아낸다(이마누엘 칸트), 시몬 베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를 생각해보자.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찬탄은 역경에 맞서는 그들의 역량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독창성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생을 살았기 때문에 본보기로 남았다.
창작의 영역에는 놀라운 본보기가 더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영화감독은 90대에도 왕성하게 작업하며 클리셰를 박살 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은 98세에 새 책을 냈고,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100세를 넘겨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천재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80세를 넘었고,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는 죽을 때까지 일했다. 또 다른 피아니스트 마르시알 솔랄은 90세에도 연주회 무대에 섰다. 그들은 단지 존재만으로 허다한 말을 무색하게 하며 우리에게 노년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노년이라는 먼 대륙의 밀사인 그들은 그곳에서 생은 맥없이 늘어지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생은 가능하고 예측 불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은 겁에 질린 반항자 무리에게 길을 열어주는 인생의 선발대다.(2022년 4월 1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19)
-허풍선이와 징징이- 156쪽

허풍선이와 징징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허풍선이는 늘 자기는 쇠도 씹어먹을 만큼 건강하고, 눈부신 성공을 즐기고, 발기나 오르가슴으로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으며, 세월의 무게를 전혀 못 느낀다는 식으로 떠든다. 허풍선이는 거드름을 피우며 자기 또래 사람들을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고 그들의 한탄을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수시로 응급 상황에 처하고 이런저런 병을 앓는다.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서 자기는 끄떡없다 말하지만 또 뭔가 문제가 생긴다. 그의 허세에는 뭔가 영웅적인 데가 있다. 이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심근경색이나 암으로 쓰러지면 오래 끌지도 않고 세상을 떠난다. 꺾어지면 꺾어질지언정 운명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 셈이다.
허풍선이의 대척점에는 징징이가 있다. 그는 매일 새로운 병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스무 살 무렵부터 당장 다음 주에는 세상에 없을 것처럼 우는 소리를 해왔는데, 그 세월만 40년이다. 이들은 늘 골골대면서도 웬만큼 건강하다는 사람들보다 오래 산다. 징징이는 안 아픈 데가 없다. 사람들이 각자의 자질구레한 불행에 몰두하는 꼴을 못 보는 그는 모두가 자기를 가엾이 여겨주기를 바란다. 남이 무슨 병을 앓든 징징이의 병에는 비할 것이 못 된다. 남의 암은 그의 류머티즘보다 가벼운 병이다. 남이 앓는 삼남염은 그의 폐색전증보다 대수롭지 않다. 징징이는 주위 사람들을 다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나서 더는 자신의 건강 문제를 토로할 친구가 없음을 아쉬워할 것이다. (2022년 4월 4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1)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169쪽

연애 결혼의 위기는 변하기 쉬운 마음뿐만 아니라 늘어난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 지금 20세에 결혼하면서 평생 배우자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서약은 평균 수명이 25~30세밖에 되지 않던 17~18세기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금 이 서약은 족히 60년을 함께 살겠다는 의미다. 부부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민감한 문제지만 재혼도 법적으로 쉬워졌다. 민주 국가에서 이혼은 간단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절차일 뿐이다(지금은 온라인으로도 이혼 신청이 가능한 국가들이 있다). 55~60 세를 지나면 자식들은 대부분 성인이고 은퇴는 기정 사실이 되므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새로운 관계를 향해 떠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성이 흔들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배우자와는 30세에 갈라설 수도 있고 60세에 갈라설 수도 있다. 갈라서기를 원하는 쪽은 주로 여성들이다.
진한 포옹이든 수줍은 애무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이제 행위가 아니라 뜨거운 공감, 합의된 포기에 있다. 신화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으나 통계를 보면 성생활을 즐길수록 오래 산다고 한다. 뭐, 이쪽으로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만 일단은 희소식이다. "나는 74세인데 요즘처럼 성생활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답니다.” 21세기 초에 영화배우 제인 폰다가 한 말이다. 그녀를 축하해주고 그 말을 믿어보자.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우리를 각성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나는 상대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의 창조자가 되고 상대는 상대대로 나의 창조자가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죽지 않아'라는 뜻이죠.”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참 잘 말해주었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삶의 낙을 맛보고, 하루하루를 허무에서 건져내고, 일상의 지지부진한 모습을 바꿔놓으려면 둘이 딱 좋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했는가? 딱히 한 일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하루 일을 세세히 늘어놓느냐 혼자 곱씹느냐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 때라도 우리가 읊조리는 불행과 비참을 따뜻하게 들어주는 이는 필요하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타자를 경청하고 위로와 조언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소소하게 마음을 써주는 자세가 벼락같은 고백보다 더 단단히 커플을 묶어준다. 인간사의 덧없음이 이때만큼 와 닿고 감정을 건드리는 때가 없다. 사이 좋은 커플은 대화가 끊이지 않고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친교를 함께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성역'은 있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가장 애틋한 것, 가족, 아이들, 친구, 사랑. 그 성역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핵심은 간간이 의심과 우울을 피할 수 없을지언정 항상 열정을 지키는 것이다. 눈이 욕망으로 빛나고 손이 애무하며 입술이 키스하는 한, 비록 나이가 여든이 됐어도 심장은 새것처럼 가슴 속에서 박동하면서 생의 활력을 우리에게 불어넣는다.
젊은데도 쾌락보다 금욕을 선택하고 스스로 육욕을 삼가는 연습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불꽃이 사그라들고 이제 욕망이 과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썩 내키지 않아 문제인 시기가 온다. 몸의 경직은 마음의 경직을 예고한다. 스토아주의가 추구하는 평정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네카)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족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는 안타깝게도 궁극의 극기가 아니라 그저 음울하고 밋밋하게 묘사된 생의 끝일 뿐이다. 17세기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은 정념에 휩쓸려 위엄을 잃고 혼란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감각의 파산을, 욕망이 말라붙어버리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건 자제력의 문제다. 나이를 먹으면서 늘 자제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어느덧 다스려야 할 욕망은 없고 깨워야 할 욕망만 있다. 과거에는 욕망을 지나가는 자리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급류처럼 묘사했다. 따라서 둑을 쌓고 댐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데 어이할까, 그 거센 물살이 줄어들어 늘 수위가 오락가락하고 걸핏하면 말라붙는 실개천이 되었다.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애정이 싹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전부를 내어놓지 않을까?

시간 속에서 사랑이나 우정을 통해 영원을 경험한 사람은 존재에 바짝 다가간 기분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진짜 비극은 언젠가 사랑하고 욕망하지 못하게 되는 것, 우리를 세상과 타자에게 다시 연결해주는 두 개의 수원水原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성의 반대는 금욕이 아니라 생의 피곤함이다. 위대한 성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다. “제게 순결을 주시되 당장 주시지는 마옵소서.” 생은 자신에게 예스라고 외친다. 존재는 무존재보다 귀하고, 욕망은 무욕보다 낫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침묵하면 타나토스가 벌써 이긴 거다. (2022년 4월 6일)

*****타나토스;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신.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2)

-노부부의 이별 공식- 173쪽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우리 곁을 지나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내디디며, 존재하는 것조차 미안한 듯 몸을 움츠리고 끗끗이 나아간다. 그들은 연약해 보이고 또 왜 그리 비틀거리는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들리고, 몸을 떤다. 그들은 역, 병원 대기실, 관청에서 기다리는 동안 수시로 벽시계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사소한 기술적 어려움에 그들은 질겁한다. 장보기, 빵이나 우유 사기, 장바구니 들기, 비밀번호 입력하기, 현금인출기에서 돈 뽑기가 고역스럽다. 외출, 산책은 매번 위험을 동반한다. 그들의 주머니를 털고 싶다면 몇 번 룩툭 치고 한두 마디 건네는 것으로 족하다. 언성만 높여도 그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떤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어디 다녀오는 것도 그들에겐 큰 시험이다. 갑자기 경로가 바뀌거나 이상한 길에 들어섰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계단은 오르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고행이다. 중간에 멈춰 서서 숨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장 약한 자들에게 긍휼을!?

부부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어떻게 될까? 둘 다 나이 들었다고 해도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니 힘이 될 뿐 뭔가 새로운 약점이 추가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남편 안에, 남편은 아내 안에 있다. 그들은 나무뿌리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두개의 얼굴, 두 개의 이름을 지닌 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 사람의 고통이 저 사람에게도 고통이 된다. “아내의 다리에 통증이 생기면 내가 아프다”고 에스파냐의 철학자 미겔 데 우나 무노는 멋지게 말했다. 한 사람이 중병이 들면 다른 사람도 그 뒤를 따르기로 하고 둘은 함께 죽을 결심을 한다.
2007년 9월, 작가 앙드레 고르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와 함께죽기로 마음 먹는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나는 당신을 그 어느 때보다도더 사랑합니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이가 떠난 후에도 세상에 남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에도 그런 커플은 있었다. 전직 상원의원이자 사회주의자인 로제 키요와 그의 아내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하고 그날까지 평온하고 유쾌하게 살아갔다(안타깝게도 아내 클레르 키요는 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그녀는 2005년에 79세의 나이로 약을 먹고 자신이 좋아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처럼 퓌드돔 호수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둘이서 마지막 여행을 떠날 수 있는데 왜 끔찍한 자연이 단 하나의 소중한 존재를 앗아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단 말인가? 죽음의 불안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소중한 사람이 없는 고독,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 상태를 피하려는 것이다. 청춘의 낭만도 있지만 노부부만의 숭고함도 있다. 존 던은 자살이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면이라고 했다. 죄는 여러 번 지을 수 있지만 사면은 단 한 번만 가능하다. (2022년 4월 8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3)
-아직도 춤을 추고자 한다.- 193쪽

그리스인들은 행동에 나서기 적합한 순간,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기, 시간의 틈새 속으로 파고드는 기술을 '카이로스라고 불렀다. 그들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머리통에 풍성한 타래를 얹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상상했다. 카이로스가 옆에서 지나갈 때 우리는 그를 못 보거나,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의 머리 타래를 확 낚아채서 제압하거나 셋 중 하나다. 그 신의 머리를 낚아채려면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한순간에 궁지에 몰려 허우적대게 될 테니까.
행동력이 있는 사람만이 직감에 힘입어 순간을 잡고 버틸 수 있다. 그러면 경쟁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다. 그들은 사건을 잘못 해석했고, 그 사람만 남들이 눈 뜨고도 보지 못한 기회를 보았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먹잇감을 본 호랑이처럼 달려들었다. 기회는 언제나 일종의 선택, 우연이 내민 손을 잡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맞받아치는 재주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한참 뒤에야 그럴싸한 대꾸가 생각난다.
정확히 때를 알고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물살에 쓸려가는 지푸라기처럼 그냥 대세에 휩쓸리는 기회주의자는 엄연히 다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불안해하며 스스로 제기하는 질문이 있다. 지금 내가 뭘 놓치는 건 아닐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거리로 나가 기회라는 놈을 붙잡기 위해 밤낮없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죽음이라고 해서 어디 예외일까. 세상을 떠나는 것도 때를 잘 타야 한다. 너무 일찍 죽거나 너무 늦게 죽으면 곤란하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에 죽거나 다른 유명인과 같은 날에 죽는 것도 안 좋다. 그런 죽음은 묻혀버린다. 장 콕토는 친구인 에디트 피아프와 같은 날 죽었다. 프랑스의 작가 장도르메송이 사망하고 24시간이 채 안 되어 조니 홀리데이가 죽었는데 이 국민가수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렀다. 미국의 배우 파라 포셋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날 죽는 바람에 완전히 묻혔다. 흔히들 죽음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 죽음의 신은 우연과 여론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속물이다.
우리 삶을 구획하는 시간부사들 중에서 '벌써'와 '아직도 역시 특별하다. '벌써'는 나이 많은 이들에게 통계적 비정상, 짜증스러운 조숙으로 와 닿는다. 벌써 의사가 됐고, 20세에 벌써 학부를 졸업했고, 벌써 결혼했고, 벌써 애도 있다고? (병원에 갔다가 내 자식 또래의 의사를 만나면 뭔가 어안이 벙벙하다.) 이제 겨우 어린애 태를 벗은 블로거,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래머, 유튜버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그의 생애를 다룬 출판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아직도'는 짜증과 고질적 비정상을 나타낸다. 아직도 여행을 다닌다고? 아직도 현역이라고? 아직도 건강하고 시력까지 좋다고? 아직도 밤에 쏘다니길 좋아하고, 50세인데 아직도 객쩍은 소리나 해대? '벌써'가 젊은 사람들의 보기 드문 능력에 대한 반응이라면 '아직도'는 당황스러운 지속에 대한 반응이다. 특히 '지금도 그래? 여전히 그러고 있단 말이야?'라는 뜻이다. 죽어가는
'아직도'는 조심스러운 바람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삶을 붙들어주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바닷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기막힌 경치나 빼어난 걸작을 마주하고 싶다 등등. 막을 내리기 전, 마지막 춤을 아직도 추고자 한다. 아직도 살고자 한다! (2022. 4. 11)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4)

-3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 203쪽

다름 아닌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느 날 유독 낯설게 보인다. 그 시절 그 꼬마는 지금의 어른과 얼마나 딴판인지 그 둘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실성한 조각가가 계제에 안맞게 삐뚤삐뚤한 선을 뽑은 것 같고, 정과 끌을 잘못 놀려 뺨을 푹 파놓고 광대뼈를 높이고 콧대를 구부리고 귀를 쭉 늘려놓은 것 같다. 무슨 마가 끼어서 하고 많은 얼굴 중에 지금의 이 얼굴이 된 거지? 늘어지고 주름 잡힌 가면을 쓴 것 같잖아! 내가 떠안은 것은 잔인한 우연일 뿐 논리 따위는 없다.
3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란 무엇인가? 너도 이렇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잔혹동화 아닌가? 젊고 팽팽한 얼굴은 구겨지고, 머리칼은 빠지고, 체형이 슬금슬금 무너져 나중엔 알아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가족사진을 보면 노인들이 손주를 붙잡고 원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씩씩하고 잘생긴 청년은 자기 아버지처럼 투실투실해질 것이고, 꿈꾸는 아가씨도 자기 어머니처럼 잘난 척하는 중년 아줌마가 될 것이다. 기이한 단락이 작용해 조카딸의 얼굴에서 당신 어머니가 보일 것이고, 또 다른 조카는 큰아버지를 빼다박을 것이다. 나이 든 자들은 어린 자들의 원기를 빨아먹고 자신의 흔적을 가차 없이 그들에게 남긴다.
스타들에게는 이러한 운명이 더욱 가혹하다. 늙고 변한 모습이 한창 아름다웠던 시절까지 짓밟는다. 술 때문에 망가진 시몬 시뇨레, 리즈 테일러, 혹은 이가 다 빠진 앙토냉 아르토는 영원히 그 모습으로 남고 만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죽은 자도 살려내는 사진 보정의 힘이 있으니까. 시계 브랜드 브라이틀링을 위해 포즈를 취한 스티브 매퀸, 크리스티앙디오르 광고 사진 속의 알랭 들롱은 젊을 때 모습으로 영원히 박제된 것 같다. 신화로 방부 처리된 광택지 안의 미라들처럼, 이제는 고인이 된 스타들을 홀로그램으로 소환할 수도 있다. 매릴린 먼로, 투팍, 빌리 홀리데이, 혹은 프랭크 자파와 클로드 프랑수아의 투어를 함께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붕괴의 법칙에는 예외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유독 일찍 시들어 30세면 벌써 얼굴이 달라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우아해지고 관록에서 풍기는 멋까지 더해진다. 나이가 그들을 더 아름답게 해주진 않았지만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멋있고 잘생긴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시간의 귀족이다.
교부들이 고민했던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최후의 심판 날에 다시 살아날 육체는 가장 젊고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일까, 죽기 전의 늙고 쇠잔한 모습일까? 혹시 우리가 그 육체의 시기를 택할 수도 있을까?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상태 그대로 부활하고, 순교자들은 끔찍한 고문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부활할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부활의 약속에 놀라운 지면을 할애한다. “치욕 속에 씨 뿌린 바 되어 영광 속에 부활한다.부패 속에 씨 뿌린 바 되어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한다. 약하게씨 뿌려진 자 강인하게 부활한다. 짐승의 육신으로 씨 뿌려져영적인 육신으로 부활한다.” 우리는 그때 신 앞에서 투명한 존재일 것이다. 남자는 남자일 것이요, 여자는 여자일 테지만 그들의 생식기는 이제 쓸모가 없으므로 “고귀한 체액으로 채워질것이고 머리칼과 손톱은 장식적 기능이 있으니 너무 길지 않은선에서 남아 있을 것이다. 혈액과 정액은 변모된 상태로 남을것이다. 영양도 필요 없으나 먹는 행위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인류는 썩지도 않고 바래지도 않는 “영적 육신의 황금 액체” 속에 녹아들 것이다. 인간의 육신이 지닌 부패성이 비부패성으15로 변모됨으로써 거의 완벽해지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신체들이 일어나리라. “부활은 다시 일어남이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빛나는 말씀 아닌가. (2022. 4. 15)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5)

-완전히 성공하지는 말라- 225쪽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면 그다음은 뭐가 있을까? 자신의 영광에 드러누워 잠들면 될까? 다른 사람들이 면류관을 엮어오고 요란하게 울리는 방울과 온갖 장식으로 우리의 가슴을 덮어주기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유산을 관리하듯 성공도 관리해야 할까? 자못 흥미로운 질문이다. 영광의 정점에 올랐던 위대한 기업 총수, 연구자, 수학자, 항해사, 예술가 들은 어쨌든 생애 말년까지 자기 작업에 기생해서, 혹은 그 작업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작업이 그들을 한껏 이용한 뒤 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성공한 삶을 정의하면서 애매모호한 일반화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쁘거나 추한 삶이 어떤지 안다. 정치와 교육의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다. 어떻게 패자를 위로하고 경쟁을 평화롭게 다스리며 한 번 졌던 자를 일으켜 두번째 기회를 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원한과 증오를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실패를 딛고 일어나되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중인물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내 안에는 늘 복수하고 싶어 하는 패자가 있다. "
성공한 삶보다는 자기를 실현한 삶이 중요하다. 예측하지 못한 곤란 앞에 마음을 열고, 손익 계산에 얽매이지 않으며, 비록 거의 끝에 다다랐어도 미래의 힘을 믿는 삶 말이다. 성공이라는 개념은 탐색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 같아 불편한 면이 있다. 가장 바랄 만한 상태에 도달했고, 그로써 모험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목표를 달성하고 임무를 완수한 상태는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거기엔 묘한 우수도 깃들어 있다. 안식처를 이미 찾았기에 방황은 끝났고, 이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안온한 슬픔이라고 할까.

복음서들은 신께서 당신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끝내 신을 발견하기보다는 계속 신을 찾는 과정에 있는 편이 더 좋다.
실패하고,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더 잘 실패하는 수밖에 없다. 오류에서 허다한 실패들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진실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지긋한 나이가 되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이 될 수 있는 존재에 완전히 이르지 못했다. 바위에 붙어 사는 굴처럼 자기에게 단단히 매여 사는 삶은 피곤하다. 조금은 자기를 떠나보는 것이, 새로움과 변화의 시험을 겪어보는 것이 아름답다.
누가 나를 더 풍요롭게 해줄까? 누가 나를 나보다 더 큰 것과 연결해줄까? 인생이 한 번뿐이라서, 몸뚱이가 하나뿐이라서 얼마나 불행한지! 정체성과 성이 여러 개라서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삶을 다 살아보면 좋으련만! 나도 여성으로, 힌두교도로, 남미 사람으로, 중세 사람으로, 르네상스 시대 사람으로, 마야 제국의 백성으로, 늑대로, 곰으로, 새로 다시 태어나보고 싶다. 끝없는 윤회를 겪어보고 싶다! (2022. 4. 18)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6)

죽음(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있다니 운이 좋기도 하지- 249쪽

사상사에서 불멸은 보통 세 가지로 구분된다. 유대인은 민족의 불멸을 말하고, 그리스인은 도시국가의 불멸을 말하며, 그리스도교는 개인의 불멸을 말한다. 우리 시대는 신도 없고 화해도 없는 불멸, 단순한 무한 지속을 원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개인의 불멸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개 인간도 1000세쯤 살다가 죽는 초장수를 추구한다.
중세에는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다가가는 길이었다. 신을 마주하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는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컸을 것이다. 사망은 구원 아니면 영원한 벌로 가는 좁은 문이었다. 보잘것없는 지상의 재물을 버리고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을 얻는다는 희망도 있었다. 대속을 생각하면 끔찍한 공포를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재창조한 영원 관념의 독특한 점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지상의 삶 이후에도 존재한다니, 실로 놀라운 소식이다.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최후의 심판이라는 '테스트'만 통과하면 잠재적으로 무한한 생을 누린다. 시험은 연옥이라는 구원의 대기실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옴으로써 다소 가벼워진다. 죽은 자의 영혼은 운명이 결판날 때까지 거기서 긴 시간을 기다릴 것이다.

이 종교의 또 다른 신의 한 수는 그리스도가 한창때인 33세에 죽었다는 설정에 있다. 백발의 노인 예수는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성부, 즉 아버지는 무섭고 근엄한 노인의 이미지인데 팔팔한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놀라운 서사적 발상이다. 복음서들은 영원한 젊음의 신화에 종교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영생을 얻으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 그러면 신은 영혼들의 죄과를 살피고, 중보자들이 그들을 변호한 끝에 지고의 심판이 떨어지리라. 죄를 짓고 방황한 인간도 속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가 생긴다. 죽음은 부수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정화의 과정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미미한 나의 탄생이 잠재적 부활의 대가족 속에 나를 영원히 편입시키는 까닭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타락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순례다.

세속적 의미의 불멸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썩 즐겁지만도 않은 듯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영생의 약속도 저주에 가깝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스트럴드 브러그'라는 불멸의 종족을 등장시켰다. 그들은 80세가 넘으면 모든 법적권리를 잃고 허약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최소한의 식량만으로 연명한다. 그래서 이 종족은 외롭고 불행하다.

체코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는 카렐 차페크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을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16세기에 태어난 가수 에밀리아 마크로풀로스는 마법사의 실험 대상이 되어 불로불사의 영약을 마셨다. 3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목소리 또한 그대로인 그녀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에 싫증이 난다. 주위 사람들은 다 그녀보다 먼저 죽거나 그녀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질려서 떠나버린다. 에밀리아는 사물들과 그림자들 사이에서 아무 애착도 없이 살아간다. 자식들, 친구들도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에밀리아는 주위의 평범한 인간들에게 “당신들은 다 죽을 거야. 운이 좋기도 하지”라고 말한다. “오, 주여, 어둠의 문을 열어주소서, 제가 그 문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죽음이라는 지평이 없는 삶은 기나긴 악몽이다. 모든 종류의 권태를 통틀어 보더라도 불멸자의 권태는 최악이다. 불멸자는 영원한 벌을 받는 자다. (2022. 4. 22)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7)

죽음(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을까 두렵다.- 256쪽

죽지 않는 인간의 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수 세기 동안 무병장수의 예언자들은 오만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젊은피 수혈, 영약, 칼로리 섭취 제한, 완전 채식, 마법의 혈청, 불가리아 요구르트, DHA 등등. 모든 사람에게 세포 재생이나 저온 요법으로 100세의 수명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철저한 절제라는 방법이 남아 있다. 19세기에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는 스스로 정한 엄격한 생활 수칙을 따랐다. 담배, 커피, 술, 자극적인 음식을 삼갔고 식사량을 제한했으며,"본능 가운데 우리를 가장 교란하는 것인 섹스도 삼갔다. 안타깝게도 실증주의의 창시자는 이토록 애를 쓰고도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노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결과였다.

건강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에게는 죽지 않으려 발악하다 사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반작용이 돌아오곤 한다. 신체 세포와 조직 보존, 손상된 기관의 교체, 정기적인 검진, 세포 리프로그래밍, 스마트 기기 이식 등에 에너지를 다 빼앗긴다면 진짜 중요한 이 질문이 밀려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번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몸에 좋다면 뭐든지 다하고 술, 맛있는 음식, 섹스를 삼간다. 접시가 가벼울수록 명줄이 길어진다”고 하니 소식(小食)을 하고 비타민이니 뭐니 하는 건강보조제를 챙겨 먹는다. 드라큘라처럼 세포와 혈액을 새로 주입받기도 한다. 100세까지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진짜 삶을 스스로 금하는 형국이다.
장수는 유전적 행운과 부단한 자기관리의 결과지만 가끔은 자기 몸을 채찍질하던 옛 고행자들이 떠오르게 한다. 솔직해지자. 다들 짧고 굵게 누리고 싶은 마음과 가늘고 길게 살고싶은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는가.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제대로 느끼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양쪽을 다 원한다. “질기게 살아남고픈 질긴 욕망”(폴 엘뤼아르)은 상당한 절제를 요구하는데도 표준적인 가치가 되었다.

20세기 말에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미국인 대학생은 140세까지 사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곡물과 천연습 위주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며 섹스, 자위행위, 위험성이 있는 활동을 삼갔다. 빼빼 마른 그 청년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노라 고백했다. 오늘날 새로운 불멸을 추구하는 순교자들이 딱 이렇다. 그들은 수명 연장에 정신이 팔려 그 연장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

우리는 100세 넘게 장수한 이들에게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들의 대답은 늘 비슷비슷하다. 많이 웃고, 잘 먹고, 많이 마시고, 왕성하게 사랑하고, 담배도 피우고,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다나. 나하고는 정반대라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편해진다. 주치의가 나한테는 그것들을 당장 끊지 않으면 올해를 못 넘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뭔데 나에게 금지된 것을 누리고도 이렇게 잘만 살지? 어떤 사람들이야?

지금까지 시간을 번다는 것은 내 시간을 귀찮고 굴욕적인 잡일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금부터는 악착같은 생산성 지상주의, 악착같이 얻어낸 하루하루의 축적을 뜻한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일에 매달리느라 죽는 것과 비슷하다고나할까. 사랑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라톤 경주처럼 조절을 잘해가면서 오래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관계, 감정, 참여의 질이 중요하다. 인생이 신체 기관들을 꼼꼼히 살피고 계속 수리하는 과정일 뿐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요양기관에서 추억을 곱씹는 일이 전부이거나, 늙고 노망이 나서 아기처럼 남들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겨주는 대로 살아가며 끝을 기다리는 노인들보다 애처로운 이는 없다.
시간을 없애거나 잊고 싶은 사람, 혹은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는 사람, 그 어느 쪽에 속하는 동요나 예기치 못한 충격의 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 치열함인가, 버티기인가. 분명히 성가신 양자택일의 문제다. 무미건조한 삶을 오래오래 살 것인가, 진짜 부딪히고 느끼는 시간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 오래 살면 그 대신 점점 쇠약해진다는 위험 요소가 있다. 이미 여러번 언급했던 이탈로 스베보의 소설에서 가져온 이 성찰은 기가 막히다. “나는 왜 몸에 나쁜 담배를 계속 피울까? 죽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가 네 번이나 심장마비를 겪고도 끝까지 하루 두 갑에서 다섯 갑의 담배를 즐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결국 1991년에 일어난 다섯 번째 심장마비가 그를 데려갔다). (2022. 4. 25)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8)

영원(불멸의 필멸자들) 270쪽


어릴 때 중병에 걸려서 좋은 점이라고는 훗날 나이가 들어서 몸을 챙기고 이것저것 삼가야만 할 때 충격이 좀 덜하다는 것뿐이다. 인생 초장에 죽을 고비를 넘겨보면 그 후의 삶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끝없이 지독한 고통, 병원 생활, 재발, 일시적 차도, 이런 레퍼토리는 다들 알 것이다. 우리는 연약함을 경험해봤다. 건강 관리가 절실한 상황이어도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어릴 때는 병약했는데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무사히 빠져나온 안 좋은 일들을 기억하면 다음에도 역시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처럼 이렇게 생각한다. 버텨라, 마음아. 너는 이미 더 가혹한 시련도 견디지 않았느냐.' 최악을 가까스로 모면한 사람은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다.

회복은 소극적인 의미의 행복, 즉 불행이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팔다리를 못 썼던 사람이 다시 쓸 수 있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다시 걸을 수 있고, 입맛이 돌아오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면 더없이 행복하다. 병원이나 요양원, 혹은 음침한 방에 격리당한 채 생활하던 사람은 평범함이 특별함이 되는 이 예외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누구나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이상이 된 것이다. 이 행복은 일단 불행이 사라져야만 경험할 수 있다.(2022년 5월 3일)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29)

죽음(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271쪽

질병은 우리에게 적어도 조심성, 저항, 연약함이라는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수학자 파스칼은 〈질병의 선용善用을 간구하는 기도>에서 병은 건강을 잘못 사용한 이에게 신이 내리는 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질병은 꼭 필요한 교정, 세상의 달콤함과 이승의 기만적인 쾌락을 멀리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파스칼은 병이 위안이 있는 재앙" 이며 죄인을 하나님에게로 다시 이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고통을 당했듯이 가엾은 병자는 자기 몸의 상처를 긍휼히 살펴야 한다. “그러니 주여, 그 모든 것과 내 죄로 인한 고통을 느끼게 하옵시고 성령의 위로를 은혜로이 내려주옵소서."

 

아무리 가벼운 병도, 단순한 감기조차도 우연한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질병이라는 경험, 삶의 또 다른 국면에 대해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자 수혜자다. 자신의 창자, 기관지, 관절에 좌우되는 상황에 놓이면 겸손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비롯된 질병에 걸리는데 그 병은 심할 경우 우리를 앗아간다. 고통은 극복만 한다면 세상 물정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각각의 병을 예술적 영감의 전주곡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켰다. 보들레르와 모파상의 매독,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프루스트의 천식, 루소나 카프카의 우울, 프리츠 조른의 암이 그랬다.
결핵은 인상적인 문학을 낳았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다보스에 있는 베르그호프 요양원을 유쾌한 휴가지처럼 묘사하지 않았던가.

건강한 자들은 아직 자기가 병든 것을 모르는 환자들이고 병자들은 이미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명철한 의식이 있기에 치유를 생각할 수 없다. 정상과 질병의 경계는 흐릿하다.

누구나 나이가 웬만큼 들면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부당함은 없다. 그냥 확률일 뿐이다. 질병은 장수가 치르는 대가다. 어떤 병은 더 심각한 병을 방지해준다.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은 중병을 피할지도 모른다. 늘 골골대는 사람에게 완치란 없고, 그냥 병에 적응해서 사는 거다. 반면, 어떤 병은 진단을 헷갈리게 한다. 속으로 조용히 진행되면서 사람을 갉아먹는 더 심각한 질환을 가려버린다.

이런 격언이 있다. 50세가 넘었는데 아침에 일어날 때 어디 아픈 데가 없으면 당신은 이미 죽은 거다. 통증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몸뚱이가 삐걱대고 항의하고 화를 낸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자기 몸에서 개선이나 쇠락의 신호를 늘 관찰하는 “경험에 의존한 의사"(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다. 나이가 많아도 개의치 않고 과식과 과음과 무리한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왕년의 로커들처럼 코카인과 버번에서 중간 단계도 없이 녹차와 미네랄워터로 갈아타고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많다. 방탕한 생활과 약물 남용에도 불구하고 세쿼이아 껍질보다 더 쪼글쪼글한 얼굴로 살아남은 유명 기타리스트나 가수를 보면 서명운동과 기금 조성으로도 복원하지못할 만큼 훼손된 문화재를 보는 기분이다.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30)

영원(불멸의 필멸자들)

-초라한 위안- 283쪽


"나는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는 비평가 장 폴랑의 말은 한결 깊은 울림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과거 소비에트연방의 반체제 인사들의 한탄을 생각나게 한다. “공산당은 죽음 이후의 생은 없으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죽음 이전의 생은 과연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지하디스트들은 분명히 죽음 이전의 생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생을 혐오한다. 있는그대로의 생, 예측이 안 되는 뜻밖의 생이 그들은 겁난다. 그들은 속히 생에서 벗어나고 싶고, 어차피 그럴 바에는 무고한 자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 피에 주린 신에게 풍성한 수확을 바칠 작정이다. 그들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자폭한다. 그 불확실성의 이름은 자유다.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하여 종교 못지않게 진정 효과가 뛰어난 철학은 다양한 책략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고대에 '위안'이라는 장르는 진정한 걸작을 낳았다. 철학의 위안은 무엇인가? 다가올 역경에 대비하여 그 역경을 가급적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프라이메디타티오Praemeditatio, 가능한 모든 곤란과 고통의 원인을 미리 숙고하고 정신 수련에 힘쓰면 실제로 역경이 일어나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불행을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불행에 대비해야 한다. 죽음, 질병, 노쇠가 두려운 이는 그러한 상황을 미리 가정함으로써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다. 궂은 자리에서 자고, 맛없는 빵과 물을 먹고, 거친 옷을 입고, 허구의 가난을 연습하면 부를 잃는 것도 그리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낙담케 하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라"라고 하지 않았는가.

최악을 상상하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세네카는 시리아를 정복한 로마 장수 파쿠비우스의 예를 든다. 그는 늘 그날 밤 죽기라도 할 것처럼 장례 만찬을 즐기고 술을 바친 후 자기를 장사지내게 했다. 이 장수가 단말마의 고통을 흉내 내면 손님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는 죽음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폭음과 폭식을 즐겼다. “이 사내가 양심 없이 한 일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행하자. 매일 잠들기 전에 기쁘고 유쾌하게 말해보자. 나는 잘 살았고 행운의 여신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다 행하였다. 신께서 다음을 허락하신다면 기쁘게 새날을 맞이하자.”

솔직히 이러한 생각이 극악의 불면증에는 의지가 된다. 절망에 허를 찔리기 싫으면 어떤 절망이 닥칠지 예상하는 데 골몰하면 된다. 우리는 지혜롭든 그렇지 않는 질병, 뜻밖의 사태, 불가피한 죽음에 발목을 잡힌다.

고대인들이 권장했던 고통의 연습이 나 상실의 모의 훈련은 현실에 불행이 닥쳤을 때 더 잘 참아내게 하는 효과가 없다. 앞으로 닥칠 나쁜 일을 세세하게 상상한다고 해서 정말로 대비가 될까? 예측한다고 비탄이 완화되지는 않는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저 정신없고 황망할 뿐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확신이 삶을 비극으로 변모시키고 수난으로 변모시킨다. 만물은 영속되지 않기에 전력으로 삶을 붙잡고 매달리고 싶어진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라도 죽기에 너무 어리지 않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반대다. 과학과 의학이 사망의 문턱을 저만치 밀어놓았기에 다들 죽기엔 너무 이르다고 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죽음은 분한 일이 되었다. 프로이트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사회가 이제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질병이나 감염에 따른 우연한 사고처럼 생각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죽음은 이제 정상이 아니다. 그렇게 된 지도 이미 한참이다.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한두 해는 더 살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그냥 가다니 원통해서 어쩌나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식물인간 비슷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정신적·신체적 불능이 죽음보다 더 고약하다.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끼치는 병은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만든다. 침을 질질 흘리고 계속 가래를 뱉어내야 하는 식물 아닌 식물 상태가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 그 상태는 두려워함이 마땅하다. 과거에는 믿음이 불완전한 자들이 영원한 지옥불에 대해서 불안해했다. 오늘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잃으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아 병원 침상에서 생존하는 삶이다. (2022. 5. 8)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31)

영원(불멸의 필멸자들)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288쪽


죽음은 악이 아니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죽음이후에도 아름다운 생이 있고 죽음이 천국의 문을 열어준다면, 다시 말해 죽음이 죄를 씻어준다면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불신자에게는 통하지 않을뿐더러 죽음의 충격을 완화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그 반대가 아닌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요즘 사람들에게, 남들은 아직 멀쩡한데 자기만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은 견디기 어렵다.

정말로 일생을 충만하게 “살 만큼 살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까? 살 만큼 충분히 살았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사기를 북돋우는 또 다른 주장을 살펴보자. 죽음을 이기려면 타자성alterite을 유지해야 한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좋은말이기는 한데,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말해 특별한 타자성에 대해서는 소용이 없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죽음이 무슨 대수랴. 우리가 피한 죽음은 생의 옆으로 비껴감에 불과하거늘!" 아, 물론 본질적인 것을 비껴갔다는 점은 애석하다. 하지만 충만한 생을 살아냈다는 생각이 최후를 덜 가혹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들한다.

어떤 이들은 죽음이 생의 사건일 수 없다고 본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이 없고, 죽으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베니뉴 보쉬에는 어느 빼어난 설교에서 죽음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 우리가 먹는 양식 속에, “우리가 죽지 않기 위하여 먹는 약 속에까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죽음이 생의 원천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이 온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와 철학이 아무리 너그러움을 발휘한들 죽음의 공포를 가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언젠가 무대에서 퇴장할 테고 잔치는 우리 없이도 계속되리라. "아주 컴컴한 그 밤의 문턱에서는 현자도 가련한 고아일 뿐이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때가 닥치면 아무리 교묘한 궤변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요, 이제 떠나야 할 자는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때는 1분이 한 세기처럼 무겁고 매 순간 형장의 칼날이 번득인다. 오, 제발!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그런 순간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15분 남짓한 시간이 온 우주의 보화보다 더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은 오고야 만다.” (프랑수아 페늘롱) (2022. 5. 13)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32)

영원(불멸의 필멸자들)

-영원은 지금 여기에- 290쪽


죽음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출발의 수호자, 다양성의 보호자다. 탄생의 은총에는 그것을 가능케 한죽음의 숙명이 따른다. 헤겔은 이 섭리를 "아이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라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요약했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은 우리 자식들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말했듯 생식은 나이 든 사람을 젊은 사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종의 영속성을 보장한다. 적당한 수의 자식을 두는 것은 한없이 번창하는 생에 대한 선험적 애정 고백이다. 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요,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도 내세는 일차적으로 자손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불멸을 누린다. 실제로 경험한 우정, 사랑, 열정, 참여, 선행이 다그러하다.

더 넓은 영역을 포용하고 사랑, 진실, 정의 같은 상대적 절대성들과 만났던 생은 분명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영광은 소수의 영웅들에게 돌아가고 거룩함은 몇몇 의인에게나 합당하다. 하지만 소박한 생도 반드시 아름다움, 형제애, 선의를 만나기 마련이다. 인간의 정수는 자기 야망을 채우는 데 있지만, 자기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의 원대한 모험에 참여하고 적어도 한번은 무한을 감지하는 데도 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의 점이자 가교이고, 닫힌 전체이자 일종의 통행로다. 이 불완전한 전체는 언젠가 사라질 테고 레지스터의 흔적, 모니터의 알고리즘, 무덤의 비석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있을 법하지 않은 천국을 추구하기보다는 이승에서 몇 번이고 거듭나는 역량으로 불멸을 생각하면 어떨까? 보쉬에는 “우리 안에는 결코 죽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어떤 성스러운 빛”, 해방으로 열린 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영혼이 죽음의 문턱에서 마침내 자신의 진실로 나아감을 기뻐해야 한다고 했다. 불가지론자인 우리를 지탱해주는 놀라운 불꽃은 생이 끝날 때 오는 해방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 영원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이다. 다른 영원은 없다.

나의 죽음은 당연히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을 전부 다 떠나보내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다. 나의 죽음은 잔혹한 공식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존재론적 재앙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살아남은 자는 텅 빈 세상에서 시대착오적인 존재일 뿐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이를 먼저 보내는 것”이라고 괴테가 말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 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생을 사랑해야만 한다. (2022. 5. 17)

 

책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33)

에필로그.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298쪽

<젊고 예쁜 여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46세의 남성이 새벽 2시까지 문이 열린 담뱃가게 앞에 잠시 차를 세운다. 그가 차에서 내린 순간, 우악스러운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웬 젊은이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그가 뭘 잘못했느냐고? 마흔이 넘은 자는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나이가 범죄다. 이것이 그 밤의 심판관들의 슬로건이었다. 그들은 30세 이하의 젊은 여성을 동반한 늙수그레한 남성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이 그들의 눈에 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남성은 동행한 여성에게 빨리 시동을 걸고 출발하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미친 듯이 도망쳤다. 덩치 좋은 젊은 남성 일고여덟 명이 그를 추격했다. 그 무리의 대장은 레고라라는 젊은이였는데 실은 그 남성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다. 건강하고 기력 좋은 40대 남성은 밤새 죽어라 달려서 그들을 거의 따돌리는가 싶었다. 그가 새벽까지 버텼다면 경찰의 도움을 받아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고라는 끝내 그를 따라잡아서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추격전은 끝났다. 하지만 가해자도 진이 다 빠졌다. 동이 틀 무렵, 레고라는 노인이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까지 빠졌으니까. 결국 그 무리는 레고라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죽일 계획을 꾸민다.>
디노 부차티의 이 현대적 우화는 놀랍다. 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 반 연민 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인생의 뼈아픈 교훈, 마침내돌아온 부메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대들을 우정,관심, 대화로 한없이 엮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세대들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다. 각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고유한 정신 구조, 거의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다. 이 사회는 윗세대나 아랫세대하고 결합할 때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한다.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발을 헛디딜까 두렵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 꿋꿋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했다.

어릴 때는 원래 고마운 것도 모르고 온 힘을 성장에 쏟기 마련이다. 고마운 마음은 나중에, 자기가 뭔가를 바치거나 무사공평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삶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가족, 친구, 부모, 조국에 입은 은혜를 돌려주어야 할 때가 결국은 온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똑같이 베품으로써 갚아야 할 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해주지 않는다. 1912년에 샤를 페기는 노인에게 존중과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생활은 벗어나고 회복되어야 할 병이 아니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저마다의 운명은 두 심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다. 우리는그 누구에게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존재를 긍정하고 무조건 찬동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세상의 광휘, 그 눈부심을 찬양하라. 지상에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동물, 풍경, 예술작품,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경탄할 만한 기회를 찾도록 하자. 세상이 추해지지 않도록 숭고한 것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매혹을 발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환상을 잃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부터 굳이 품고 갈 가치가 없던 환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환상은 청소년기의 신기루 혹은 달콤한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저주하기보다는 열정적으로 이 시간에 동조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마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처럼, 70세, 80 세에도 황금기를 추가로 더 받아낸 사람처럼, 자기 신체와 정신과 애정에 허용된 능력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운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복한 인생이었는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든, 어느덧 땅거미가내려앉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상처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2022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