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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신화로 읽는 심리학(김상준 지음)

Bravery-무용- 2019. 12. 16. 23:12

영화와 신화로 읽는 심리학(김상준 지음)

영화와 신화로 읽는 심리학 우리 삶을 읽는 궁극의 메타포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이 영화와 신화를 통해 알려주는 우리 삶의 생?로?병?사★

이 책은 우리 마음속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신화와 그 신화를 차용하고 있는 영화를 통해 우리 삶을 조망해보고 우리 모두 겪게 되는 통과의례인 생로병사를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다. 삶은 어느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고 때로는 혹독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주어진 삶을 잘 가꾸어나갈 수 있다. 이 책이 조금이나마 그러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

-영화와 신화 속의 메타포를 통해 우리 삶을 이해하고 스스로 치유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심리학 도서

영화와 신화는 우리 삶을 읽는 궁극의 메타포
신화를 보면 신화 속 주인공들은 바보스러울 만치 순진하게 위험한 사랑에 빠지고, 선과 악으로 대립하고, 아집과 탐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형을 원색적이고 거짓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신화는 비록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원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차용하는 장르가 있다. 바로 영화다. 영화가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영화 속 이야기가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인간 마음속의 원형을 자극해야 하므로 자연히 인간의 원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신화를 은연중에 영화 속에 변형해 등장시키거나 차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화와 그것을 차용한 영화는 우리 인간의 감정과 삶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거대한 메타포다.
이 책은 거꾸로 영화를 신화로 환원하고 있다. 영화를 신화로 환원하면 복잡한 줄거리는 단순해지고, 이야기는 몇 개의 자극적인 원형으로 압축된다. 이때 우리는 왜 그때 그 영화를 보고 흥분하고, 분노하고, 만족스러워하고, 눈물을 흘렸는지 알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속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원형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과 문제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조망해보고 더 나은 답을 구할 수 있다.
제1장 ‘자아를 찾아서’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페르소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삶에서 페르소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자신답게 살기 위해 페르소나를 걷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제2장 ‘시련을 건너는 법’에서는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삶은 늘 힘겨운 숙제인 이유가 무엇일까?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때 그것을 건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무엇일까?
제3장 ‘사랑의 의미’에서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느끼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현대에는 금기시되는 동성애가 고대에는 보편적이었던 이유에 대해 말한다.
제4장 ‘인간 내면의 본능과 욕망의 그림자’에서는 욕망의 억압과 분출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또한 무의식, 잠재의식 등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5장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삶이란 무엇인지 철학적 고찰을 해본다. 또한 생명 연장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을 알아보고 노년에도 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19편의 영화와 관련 신화로 우리 삶의 중요한 문제를 조망하다
이 책은 시간이 흘러도 명작으로 인정받는 19편의 영화와 관련 신화를 통해 삶과 죽음을 조망하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보여주면서 주어진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잘 꾸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마스크]와 [트루먼 쇼]에서는 주어진 삶과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 사이의 균형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뮤리엘의 웨딩]에서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통해 주입된 열등감과 우월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풀 몬티]에서는 가부장제가 비단 남자들만 억압하는 것이 아닌 무너지는 가부장제하에서 ‘남성다움’의 사회적 가치관으로 인해 고통받는 남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달콤한 인생]에서는 제목과 달리 비극적 삶으로 마감하는 주인공 선우를 통해 충성과 성실을 다하는 삶이 때로 보상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와일드] [밀양]을 통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을 때 그 감정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굿 윌 헌팅]에서는 감정에 상처받아 이성으로 무장한 헌팅을 통해 우리 삶에서 감정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12몽키즈]에서는 너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성행했던 이론적인 근거인 플라톤의 ?향연?을 살펴보고, 사랑이 비단 남녀 사이의 감정이 아닌 사람과 사이의 감정이라고 할 때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음을 말한다.
[닉슨]에서는 로버트 케네디를 향한 닉슨의 콤플렉스를 통해 콤플렉스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삶에 발전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덧붙여 이야기한다.

닉슨은 동생이 죽고 형마저 죽자 실의에 빠진다. 이때 닉슨의 어머니는 '신이 너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형제를 희생한 것'이라고 하며 닉슨을 위로해준다. 그래서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나는 네 명의 시체를 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라고 했다. 두 명은 병으로 사망한 자신의 형제를 말하고, 두 명은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를 말한다. 158쪽

콤플렉스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 존재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고 저신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데 자극제가 된다. 자신의 꿈이나 야망을 이루고 난 뒤 이제 됐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닉슨처럼 더 많이 인정벋으려 하고, 더 많이 성공하려고 하면 콤플렉스는 결국 걸림돌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콤플렉스의 양면성이다. 160쪽 

 

콤플렉스는 삶에 적당한 긴장감이 될 수 있다 160쪽

콤플렉스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유독 특정한 주제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반응을 보인다면 그가 그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금방 표정이 달라지거나 흥분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학벌 이야기만 나오면 말수가 적어지고 그 자리를 피하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술만 마시면 부자들에 대해 공격적인 말을 퍼붓고 적대시하기도 한다. 이는 대부분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 때문이다. 우리는 재벌 2세나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마약이나 음주, 폭행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는 보도를 접할 때가 많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무엇이 아쉬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콤플렉스가 적기 때문에 자신을 계발하거나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의 목적이 없게 되고, 결국 그런 공허함을 술과 마약으로 채우게 된다.

 

[더 헌트]에서는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 신화 이야기를 교차하며 편견과 오해는 사람을 향한 잔인한 사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고괴담]에서는 억압되고 억압된 감정은 인격의 그림자를 형성해 타인을 향해 파괴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희생양 의식은 동물을 통해 이러한 파괴성을 해소하는 의식이었지만, 희생양 의식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인간의 파괴성이 다른 인간을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희생양이란 말은 고대 히브류의 희생양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182쪽  

[스피어]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화에서 저승에 다녀온 이야기들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임을 설명하고 있다.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은밀하지만 강렬한 성적 욕망과 성적 공상에 대해 알아보고 인간관계에서 점점 개인화되고 수동화되어 가는 미래에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성적 만족을 얻는 행위가 보편화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무생물인 조각품을 사랑했으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으로 변한 조각품을 맞닥뜨림으로써 이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 ‘피그말리온 신화’를 상기해보고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스틸 라이프]에서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여행을 하는 존재로서 현재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본다. 또 ‘시시포스의 신화’를 통해 우리 삶에서 비움이 또 다른 채움임을 말한다.

[심플 라이프]에서는 노년의 통합을 이룬 주인공 아타오의 삶을 통해 삶에서 늙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100세 시대를 맞아 노년기를 잘 가꾸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여인사십]에서는 생명 연장으로 인해 인간사에서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치매라는 병을 살펴보고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또 ‘에오스와 티토누스’의 신화를 통해 인간의 꿈인 ‘불사의 삶’이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알아보고 정신과 육체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 책은 19편의 명화와 많은 신화를 아우르며 우리 누구나 삶에서 맞닥뜨리지만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삶은 어느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고, 때로는 혹독하지만 우리가 그 이면에 깔린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주어진 삶을 잘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이 책은 조금이나마 그러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이어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바로 신에 의해 갈라진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는 이유는 예전의 팔과 다리가 4개였던 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욕구 때문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의 반쪽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전에 남자 성기가 한 쌍이 있었던 사람은 이렇게 몸이 갈라진 후에도 남성만을 사랑하며, 여성의 성기가 한 쌍이 있었던 사람은 여성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남녀 성기를 각각 한 개씩 지니고 있었던 사람은 이성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의 근원이 바로 원초적 인간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원초적 인간이 분할된 것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인간은 분리되었지만, 신에게 헌신한다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축복을 준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감정이며, 잘린 자신의 반쪽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따금 놀라게 된다. 바로 신들에게 만연한 동성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제3장, 사랑의 의미, p. 147∼148

닉슨은 대통령에 재선되고 나서 자신감이 붙고 성공에 도취하고 만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도취되어 현실적인 판단력을 잃고 만다. 마치 이카로스가 땅이라는 현실에서 너무 높이 날아오른 것과 같다. 그러나 이카로스의 추락은 사실 그의 아버지의 죄에 기인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재능을 질투하고 시기한 결과다.
마치 닉슨이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집안 배경을 가진 케네디에 대한 질투와 시기에서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이 그를 파멸하게 한 것처럼 말이다.
-제4장, 인간 내면의 본능과 욕망의 그림자, p. 166∼168

이들의 목적은 누가 보더라도 엉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무의식의 세계에 내려갔으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의식의 내용을 동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여기서 두 명의 영웅이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납치하려고 했던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려고 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식에 의식이 완전히 묻혀버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데스가 이들에게 처음 내리려고 했던 벌은 죽음이었다. 이런 상태가 된다면 의식은 완전히 소진되어 멍한 상태에 빠지거나 정신병적인 상태에 이르러 자신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데스가 이들에게 내린 벌은 망각의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망각의 의자가 상징하는 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에 튀어 나왔을 때 우리가 흔히 의식적으로 부정하거나 모른 체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뭔가 자신 안에 불쾌하고 불편한 느낌 등이 있으나 이것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의식에 지나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내용을 억지로 잊고 현실만을 보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영원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스피어]에서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노먼, 베스, 해리는 마법의 능력이 있는 구체에 대한 사실을 잊기로 한다. 이 장면은 하데스가 내린 벌인 망각의 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사실 구체가 남용될 것이 두려워서 잊기로 했다기보다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 탐욕, 살의, 경쟁심 등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모두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고 다시 지적이며 선량한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제4장, 인간 내면의 본능과 욕망의 그림자, p. 212∼213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점점 수동적이 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며, 개인적인 생활에 파묻히게 되는 현대인들에게 페티시는 점점 더 확산될 것이다.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그도 무생물인 조각작품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 변한 자신의 조각품과 맞닥뜨림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던 이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앞으로 친밀감이 없는 성행위, 즉 포르노그래피 같은 페티시를 사랑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현상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도 페티시를 통해 성적 만족을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SF영화들이 보여주듯이 미래의 성행위는 가상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화될지도 모른다.
-제4장, 인간 내면의 본능과 욕망의 그림자, p. 226

모든 것을 움켜쥐기만 하고 절대 내 인생에서는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상실감은 너무나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나 느닷없이 또는 서서히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상실감을 보다 덜 겪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시포스 신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소중한 진리다.
시시포스는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바위를 정상까지 굴려서 올린다. 그리고 그 바위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상실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 상실감을 이겨내고 다시 바위를 저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려고 애를 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이며, 상실을 자신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세상만사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진리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만이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더욱 큰 상실감을 낳는 법이다.
인생의 이법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질 때, 나도 자연의 법칙에 속하는 일부분이라고 자각할 때 우리는 도리어 상실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5장,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 p. 236∼237

고독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는 가장 큰 대비를 이루는 사건이다. 인생의 끝을 가장 외롭게 마치는 것을 뜻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마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실패한 삶은 없다. 실패한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성공을 단지 돈, 재산, 명예 등의 세속적인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스틸 라이프]에서 존 메이는 망자들이 비록 가족도 없이 홀로 죽었지만, 우리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훌륭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장례식만이라도 제대로 해주려고 한 것이다. 자신이 맡은 망자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한 삶을 살았던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삶이란 소풍을 마치고 이 생을 떠난 사람들을 축하해 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임박해서, 삶의 끝자락에 당도해서 삶의 귀중함을 느끼지 말고, 그전에 이 삶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으며 멋진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데스(죽음)가 플루토스(넉넉하게 하는 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로 죽음이 있어 삶은 더 귀하고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제5장,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 p. 247∼248

물론 통합과 절망의 과제는 노년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지나간 인생이 잘됐든 잘못됐든, 후회스런 일이 많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현재가 평화로울 수 있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심플 라이프]다. 인생은 결국 아주 단순하다는사실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성년이 되고 또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아주 단순한 순환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또한 그런 삶의 순환은 홍콩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심플한 삶을 사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더 많이 가지려 애쓰고, 더 좋은 것을 누리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삶은 태어나고 자라고 성년이 되고 또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단순한 순환이라는 사실이다.
-제5장,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 p. 258∼259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2019년 12월 14일 읽다

 

 

광야의 예수를 향한 사탄의 세 가지 유혹 85쪽

예수가 본격적으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나서기 전 그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 상태였는데, 사탄이 나타나 이렇게 유혹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바꿔보시오.”

그러나 예수는 곧바로 맞받아친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자 사탄이 물러갔다.

그러나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에게 두 번째 유혹을 한다.

사탄은 예수를 광야에서 거룩한 성, 즉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예루살렘 성전의 꼭대기에 세운 다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며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구약의 신명기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를 몰아붙인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이곳에서 뛰어내려 보란 말이오."

그러자 예수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면서 두 번째 유혹도 물리쳐버린다.

두 번의 유혹이 실패하자, 사탄은 예수를 아주 높은 산의 꼭대기로 데려간다.

그리고 산 밑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소”라고 유혹한다.

사탄은 자신이 세상 모든 나라를 쥐고 있으니 자신에게 경배하면 그 나라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세 번째 유혹을 하자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라고 하지 않았느 냐?”라고 말했다. 결국 사탄은 예수의 곁을 떠났다.


40년간의 고통스런 광야 생활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선사한 가치  88쪽

예수가 받은 세 가지 유혹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혹에서 사탄이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한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세상을 구원해 보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을 나눠주고 물질이 넘치게 해준다고 하면 그 사람을 따르고 시키는 대로 다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물질로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구원은 물질이 아니라 말씀, 즉 진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예수는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기적이나 쇼맨십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욕구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그는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그런 기적이나 이적행위는 정말 사소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종교에서 기적이나 이적행위만을 바라고, 그런 징표가 있어야 종교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기적이나 이적은 헛된 것이며, 참된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유혹은 사탄이 자신에게 엎드리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 즉 권력, 명예, 부와 재산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욕구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손에 돈과 부귀가 들어오기를 바라고, 종교에서도 그걸 바라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과 거래를 하고 거기서 만 족감을 얻는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런 유혹을 받을 때 물질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진리의 길로 들어선 자만이 제대로 종교를 받아들이고 올곧게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광야로 간 이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던 것일까?

광야는 세상을 구원하기 직전의 예수를 마지막으로 담금질하기 위한 장소였다.

광야라는 장소는 거칠고 위험이 따르며 먹을거리도 찾기 힘든 척박한 곳으로 죽음과 쇠퇴, 파멸의 땅이다.

또한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이스라엘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40년간 방랑의 길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척박함 속에 깃든 고통과 고난이 이스라엘 민족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면서 제대로 된 종교에 다가서게 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커지고 불신이 없어지고 진리를 추구하게 된 것은 광야의 척박한 땅에서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지만,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종교생활을 한다면 그 험한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분명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지냈는데, 이 광야 체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적의 공격, 부족한 물과 음식, 상황이 나빠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백성의 원성과 불만 속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극도의 고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순수하게 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갈수 있게 함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광야를 건너지 못하고 40년이나 방랑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단련을 하고 시련을 극복하고 어려움 앞에서 절대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척박한 광야에서의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담금질의 시간을 통해 우리 내면은 정화될 수 있다.95쪽

광야란 원래 고독함, 황량함, 고난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장소다.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고,

어떤 생물도 살아갈 수 없는 곳 처럼 보인다. 하지만 광야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생물들이 살고 있고, 어느 곳에는 물이 존재한다. 성서에서 광야는 시련과 단련을 통해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갔던 것이다.

그는 광야에서 인간 예수로서 유혹을 받고, 또 황량한 벌판에서 굶주림과 피곤함, 목마름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가장 중요한 정수를 뽑아냈다.

예수는 광야에서 담금질을 한 뒤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인간 예수는 아주 강해지고 단단해져 돌아온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40년을 방랑한 끝에 도달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강인해져 있었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모두 광야에서 털어버리고 자유인으로 거듭난 것과 같다.

영화 (와일드)의 쉐릴이 치유받는 곳도 바로 광야다.

쉐릴은 힘든 한 걸 음 한 걸음을 떼면서 자기 속에 존재하는 온갖 부정적이고 나쁜 것들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떨쳐내려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싸 안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부분이다.

광야에서 노숙자처럼 돌아다니고, 씻지도 못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허덕이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나쁜 것들을 모두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간에 내 안의 한 부분임을 인정함으로써 그리고 내 안에 나약함과 부서지기 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쉐릴은 자신이 지고 있는 커다란 짐을 완전히 벗을 수 있었다.

광야는 잔인하고 메마르고 공포스러운 곳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을 통해 치유와 안식을 주는 곳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좌절과 실패, 절망과도 같다.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이 겪은 40년, 예수가 겪은 40일, 쉐릴이 겪은 3달간의 담금질이 그 이후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삶에서 이러한 담금질의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