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신부님 강론정리(지례 성당, 박진수 시메온) 2021년 2월, 3월

Bravery-무용- 2021. 2. 9. 09:28

2021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복음 마르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2021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박진수 시메온 신부님 강론) 내 자신의 복음서를 만들자

지금 우리처럼 복음을 읽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모여들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우리들의 차이점은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두 눈으로 평소에도 바라볼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이 점만 차이가 날 뿐 그들이 보이는 예수님께 다가선 것이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신앙의 힘으로 믿음 안에서 그분 가까이 우리 스스로가 나온 것이나 진배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두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주변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음을 예수님께 말씀드렸고,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님 가까이 데리고 왔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단순하게 그 옆에 있어서 얼마나 쉽게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은 다른 말은 의례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에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나, 달려가기만 하면 예수님을 꼭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들 역시도 얼마나 엄청난 장벽 앞에 가로막혀 있어야 하는 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손만 내 뻗으면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분 가까이 다가서기에는 그 엄청난 수많은 인파를 뚫고 뚫고, 가로지르고, 밀치고, 잡아당기고 어떻든 한 번 예수님 가까이 다가서서 내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한 번 다 털어놓고 싶은 그런 신념 하나를 갖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분 손 한번 붙잡기 위해서 나가고 나가고 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신앙 안에서 우리가 훨씬 더 예수님 가까이 만나기에 수월한 점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좋은 조건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힘들게 힘들게 그분 가까이 다가섰던 사람들 그러나 그게 됐을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신앙만 갖고 있으면 예수님 가까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면은 성경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그 내용들이 우리 자신과 어쩌면 가까이할 수도 없는 그런 면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섰던 그런 어떤 종교들을 간단하게 이렇게 분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신앙이 없더라도 주변의 여러 누군가가 내가 짐작도 못한 어떤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음을... 예수님께 저 사람이 요즘 매우 곤궁한 처지에 처해 있으니까 예수님 저분을 도와주세요 누군가는 분명히 나를 위해서 분명히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치는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어떤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분명히 예수님께 청을 드리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쩌면 별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본인 당사자는 신앙심이 아예 없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권유, 주변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서 치유받은 이들이 있었지요. 내 신앙과 아무런 관계없이 바로 그 누군가의 덕분으로, 그 누군가 때문에 내가 지금도 살아가고 있음을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면요. 이건 보통 놀라운 사실이 아니지요. 큰 사건입니다. 그래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삶을 살아가면서 한 지역 안에서도 의례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이와 같은 평범한 삶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살아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사회와 더불어 지역 주민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복음화시키고 어떠한 성사화를 시켜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온몸으로 부딪치는 것을 하나의 은총으로 표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과 우리 삶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삶 자체가 곧 은총이요, 삶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하려는 좋은 삶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거죠. 이런 점을 ㅇㅇ하게 될 때 우리에게서도 평소에 그 누군가를 위해서 이미 살아온 것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듯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실 살아왔습니다. 가정을 생각하더라도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위해서 이미 우리는 살아왔었죠.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요. 그러니까 어떤 얘기를 성경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평소에 언제나 부딪치고 있는 그 사실을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잔잔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인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예수님이 계셨고 그 예수님 한 테로 그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 사람들이, 멀리사는 사람까지도 하나하나 몰려들어 왔다는 우리 역시도 많은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분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왔었음을.....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내 앞으로 곧 살아있는 복음이요, 살아있는 기쁜 소식임을 우리는 늘 확신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한테 무언가를 청하기 전에 이미 세례성사를 통해서, 견진을 통해서 그분이 나에게 주셨던 모든 은총과 권능과 능력을 내가 하려 할 수 있을 수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남들에게로 향하는 사람인지 이제 지금처럼 예수님께 청하는 사람처럼 청하는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셔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드러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치유도, 놀라운 기적도, 누군가를 향하는 어떤  마음의 열어젖힘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손도 결국 복음 자체의 기쁜 소식이요 구원이 내 자신이 바로 내 자신의 잔잔한 일상생활 안에서 만들어내고 써 내려가야 한다는 그런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읽는 이 복음을 이런 식으로 읽고 써 내려가는 이런 일들이 아니라 이제는 내 자신의 복음의 역사를 내가 기록해 나가야 합니다. 나의 기쁜 소식의 그 삶들을 나의 복음서를 만들고 그 복음서에 내가 하나하나 적어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예수님의 삶, 이제는 내가 이 세상 속에 드러내고 펼쳐야 할 나의 삶 그것을 나의 복음으로, 나의 성령으로, 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그 모든 능력을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건가 하는 이 점은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자녀요 친구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동반자요, 그분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이런 복음을 써내려 갈 수 있는 모든 삶의 ㅇㅇ까지도 바로 나를 위해서 마련해 주셨으며 우리는 이 자리에서 미사를 통해서 감사하고 그분께 찬미를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자리여야 옳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한 주간 다른 것은 또 모르더라도 무엇보다도 내가 내 자신의 성경을, 내 자신의 복음을 스스로가 적어 나갈 수 있는, 기술할 수 있는 그런 멋지고 자신 있고 당당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그분의 동반자로서 한 주간을 열어보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내가 만 읽는 성경책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는 책이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실현하려는 진짜 살아있는 이 시대의 책.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외인들이 나를 보고 성경을 읽어 낼 수 있도록 나를 보고 또 다른 성경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바로 그런 내 자신의 책무가 신앙의 의무가, 신앙의 거룩함들이 나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런 나를 자신 있게 드러내시고 더 확신을 갖고 나를 편찰하시고 그런 내 자신을 당당하게 정말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세상 속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속으로 계속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의 삶 속에는 에수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운 치유가, 기적이 드러내셔서 하셨던 것들이 이에 다 담겨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번 한 주간 내 자신의 살아있는 책으로써 내스스로 그런 삶이 만들어지고 내 자신 안에, 내 가족에,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이웃 주변에 더 많은 하늘의 따뜻함들이 전해지기를 또 우리 명절을 기다리면서 또 힘들고 어려운 가정에도 어려운 분들에게도 그런 나의 열려져 있는 그런 사람들이 전달되어지는 그런 좋은 설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1년 2월 14일 연중 제6주일

복음 마르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2021년 2월 14일 연중 제6주일 (박진수 시메온 신부님 강론)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복음임을 가슴 속에...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건 단지 제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생각하고, 제가 성경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해석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줄 따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저의 이야기에 귀를 쭁긋 세우고 들으려는 여러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각자 각자가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내고 표현하라는 더 중요한 사명을 맡겨주신 셈이지요. 또 그것이 복음을 접근해 들어가는 우리들의 옮바른 자세가 될 것입니다.

저의 강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강론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만이 세상을, 그분께로 이끌어 나가고 많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나름대로 노력하고 겸손해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찾고 기도드리는 그 열매들이 어떤 수고로움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면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느 한순간에 완전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았었죠. 우리는 잘 압니다. 그들은 에수님을 배신했고 도망 다녔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뿔뿔이 헤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반자로서 살아갔을 때도 아주 덤벙덤벙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들을 무책임하게 모두 내뱉은 적도 많이 있었지요. 어떤 제자들은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제자들 사이에 많은 분란을 일으켰던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배 그물을 삼아서 주무시고 계실 때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던 그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도 아주 선하게 다가오고 있죠.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너무 쉽게 우리가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다른 죄목보다도 더 쉽게 우리들의 가슴을 져며들어오는 내용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내용일 겁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사도들의 무리가 이런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죠. 한 번은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됐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예수님께서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시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서 뽑아낼 엑기스를 찾지 못하겠으니 이제 당신이 필요 없소,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에수님을 등지고 원래 자기 자신들의 삶으로 가버렸죠.

복음서를 보면 기쁜 소식이라 그러면서도 그것과 반대되는 그런 어떤 삶의 서술들이 많이 펼쳐져있습니다. 기쁨이 그저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주어지는 그런 어떤 즐거움, 행복, 평안 이런 내용으로서의 기쁨이 아니란 걸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 기쁨의 하나 우리 자신들이 우리 손아귀에 움켜쥐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그 반대의 삶을 직접 부딪치면서 어려운 가운데서 그것을 헤쳐 나가야 우리 손아귀에 떡하니 잡을 수 있는가를 복음서는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바로 이 미사라 고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세겨볼건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일 겁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저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큰 살아있는 성전이라는 이 세상 사이에 지옥이라고 하는, 우주라고 하는 대 성전에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통해서 이제 여러분들이 저처럼 세상 안팎에 선포하셔야 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은 세상 속에서 여러분들의 가정에 들어가셔서, 이웃을 향해 선포하는 진짜 살아있는 사제들이십니다. 저처럼 신자들이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그저 아늑한 비닐하우스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그런 한 허약한 인간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때로는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면서도 하염없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도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삶을 지켜 살아가야 될 여러분들이야 말로 더 거친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천국을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드러나야 되는 가장 소중한 소명이 바로 여러분 두 어깨에, 삶의 다리애 달려있는 거죠.

예수님은 저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팔을 대신할 여러분들의 두 손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달려갈 여러분들의 두 팔을 통해서, 그분의 입을 대신할 여러분들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한 성심이 여러분들의 따뜻한 가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천국을, 하늘나라를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교회가, 신앙인들이 저를 언제나 지켜줍니다. 그러나 이 거친 이 가 별로 없는 세상 속에서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 속에 던져진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십니다. 누구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삶들이 언제나 제 눈앞에는 선하게 다 지나갑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신부가 여러분들을 지켜 줬습니까, 수도자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지켜드렸습니까, 세상이 여러분들의 삶을 보호해 드렸습니까 여러분들 스스로가 지켜왔더랬습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자매 형제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때로는 실망과 좌절과 쓰러짐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그 믿음 하나 때문에 또 일어서고 일어서면서 자신은 지금껏 살아오신 겁니다. 

우리는 잘 드러나지 않지마는 내 옆에 그 누군가가 똑같은 신앙인이 나와 같이 어러움 속에서도 살아온 그 삶이 있었기에 바로 그 힘으로 우리가 버티며 왔고 그래도 지금까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은총의 삶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쩌면이 아니라 가장 정확하게 여러분들은 저희들 보다도 훨씬 더 하느님의 더 많은 은총이 필요한 진짜 살아있는 수도자들 이시라는 걸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은 은총 없이도 신자들이 지켜주는 그 자체만으로서도 세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정말 그런 볼일 없는 사제요 수도자들인지 모릅니다. 실제 그렇게 살아왔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을, 얼마나 많은 좋지 않은 표현들을 보여드렸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버티어 낼 수 없는 저 거친 세상 속에서 직접 부딪치면서 살아가셔야 될 진짜 살아있는 그리스도요, 어느 또 다른 성모 마리아 시라는 걸 다시 한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또 실제 그러할 겁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수도자요, 수도자다운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오늘도 이 미사를 마치고 또 나가셔야 될 여러분들의 그 삶 속에 저는 단지 좋은 마음만 갖고 성모님께, 예수님께 여러분들을, 당신들을 제 어머니들을, 제 아버지들을, 제 형님 누님들을, 제 동생들을 지켜주십사라고 간절히 청할 뿐입니다.

이렇게 허약하기 짝이 없는 기도만 드리느라 그것도 힘겹게 드리느라 이렇게 고백하는 자체가 사실은 매우 부끄러운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분의 힘으로, 그분의 거룩한 성심의 능력으로 나가고 있으니 거기에 또 매달리고 또 매달릴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숱한 실패와 좌절과 고뇌 속에서도 ㅇㅇ속에서도 모든 것을 다 앉아 주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 자신의 많은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또다시 세상의 사도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오늘도 불러주셨으니 이 자체가 감사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처럼 보여줄 것이나 그러나 이  ㅇ 동안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라는 것임을 다시 한번 더 넉넉하게 생각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오늘을 더 싱그러운 내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ㅇ인가 하느님의 역사 속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자신이 이미 사제요 그리스도임을 내 자신의 삶의 역사가 나의 성경의 역사임을 다시 한번 새겨주시기 바랍니다.

나한데 펼쳐져있는 2000년 전의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 나의 숨 쉬고 사랑하고 먹고 만나고 일하고 땀 흘리고 잠을 자거나  이 하나하나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쓰라고 맡겨주신 나의 개인의 역사임을, 나의 개인의 살아있는 기쁜 소식의 성경임을, 말씀임을 다시 한번 꼭 깊이 새겨주십시오. 그래서 ㅇㅇ나는 글자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으면서 꿈틀대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진짜 복음임을 기쁜 소식임을 오늘도 여러분들 가슴속에 가득 채워가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2021년 3월 7일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2021년 3월 7일 2021년 3월 7일 사순 제3주일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 내 생활을 하느님께 바치자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름대로 좋은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허물이나 결점이란 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무서운 기형물이 되고 말았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모두 좋은 것 밖에 없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을 아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바리사이인들의 태도를 너무나 쉽게 ㅇㅇ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의 결점은 그런 우리 자신들을 매질해주고 우리를 겸손케 만듭니다. 그렇게 일찍이 교회는 우리들에게 구세주를 얻게 한 복된 ㅇㅇㅇ말했습니다. 겸손되 고백한 우리의 결점이나 허물은 우리를 하느님께 한층 더 가깝게 데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셰익스피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적은 교만이 되기 쉽습니다. 만일 결점에 의해서 채찍질당하는 일이 없다면 아주 오만하기 쉽습니다. 이 매질이라는 아픔의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들의 사랑 베풀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간이란 결국 우리들이 사랑 베풀기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기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들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끊임없이 채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것을 무리하게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들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게 된 순간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시작한 바로 그 순간과 지상에서의 우리들의 생활이 끝나는 순간과의 사이에는 사랑으로써 하느님께 우리들이 응답할 수 있는 현제라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 이 하루의 모든 순간을 그리고 이제부터의 내 생활의 모든 순간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복음 요한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박진수 시메온 신부님 강론) 기도의 중요성

우리는 별로 믿지 않으면서도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기도가 갖고 있는 그 큰 힘은 실로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라도 왕을 맘껏 만날 수 있고,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얻을 수 있는 여왕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임과 동시에 그 분과 내 자신의 삶을 하나 됨을 위해서는 거기에 사랑이라고 하는 글자 하나를 더 추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와 삶 속에서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성심을 움직일뿐더러 더 나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과의 하느님을 통하여 계속 나가게 만드는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이런 게 기도라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가 이 정도로 큰 것이라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힘들어하고 재미없는 일로 여기는 걸까 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떤 정의로운 ㅇㅇ를 갖고 경건한 기도를 많이 또는 전혀 할 수 없는 사람들일 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기도문이 적혀있는 책을 이리저리 찾아다녀야 하고 수많은 책들을 읽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기도 잘하기를 바란다면 우리 인생은 말 그대로 굉장히 서글프게 변해갈 것입니다. 그 많은 책 중에 과연 우리가 어떤 책을 바르게 골라 ㅇㅇ해야 될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깜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는 하느님께 내가 말하고 싶은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그렇다면 그자체로써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알아주시고 이해해 주실겁니다. 복음서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다가섰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뿌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깊은  여기에는 복잡하고 많이 배워야하고 전문적인 용어가 들어가야 되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바라보고있는 어린아기와 같은 그 순수한, 단순한 눈길이면 충분하다 싶습니다. 만일에 그런 단순한 눈길이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와 고마움의 외침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을때 뿐만아니라 좋지 않을 때에도 어린아이가 엄마품에 꼭 앉기듯 하느님께 우리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올려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때 기도로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넓혀주고, 그때 하느님과 내 자신은 쉽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결합되게 되었습니다.

맨발 가르멜 설립자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란 기꺼이 함께 있고 싶은 좋은 친구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언젠가도 데레사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무척이나 이뻐하신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를 이뻐해 주시는 그 분과 내 자신이 단 둘이 자주자주 만나서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라는 데레사의 말씀을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고충이 크다 하더라도 심지어 내 자신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 사막보다 더 삭막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더 이상 어떤 좋은 생각도 할 힘자체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천히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던 주님의 기도를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을 모아 바친다면 그 사막보다도 더 무서운 황막함까지 그분은 다 몰아내 주십니다.

우리 신앙은 이처럼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특히 그분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던 이 주님의 기도는 어떤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를 밝게 비쳐 주시는 좋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한 삶의 열매라 믿습니다.

ㅇㅇ라는 한 지식인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지렛대와 지침을 주면은 그것으로 이 세상을 한 번 바꾸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말로써만 남에게 뭔가를 의탁하려고 하는 식자였지만 실제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당대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성인은 전혀 달랐습니다. 성인들은 하느님 손수 지축이 되었음을 믿었고 그대로 자기 자신들의 삶과 기도를 통해서 스스로가 지렛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꾸준히 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바른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기 전엔 이미 그 주변에선 사람들이 그들의 ㅇㅇ를 따라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듯이 성인들 주변에는 언제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하느님의 ㅇㅇ하시므로 그들 주변으로 가까이 계속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들의 삶이 분명히 전과는 다른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뜻이 될 겁니다. 바로 세상을 하느님께 청하게 됐던 분,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 존경하는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 역시도 똑같은 길로 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분명 그 누군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더 난 삶으로 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내적인 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분명 우리 주변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는 그 기도의 지렛대의 역할이 우리 자신에게 고스란히 다 담겨져 있음을 우리는 이번 한 주간 동안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좋은 열매로 맺어지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청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향해 엄마를 바라보는 아빠를 바라보는 우리 아이 눈망울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우리 자신의 눈길이 천국으로 향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천국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2021년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복음 요한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2021년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박진수 시메온 신부님 강론) 작은 희생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고 하는 책자를 프랑스의 '장 지오드'라는 사람이 썼는데 실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프랑스 지방의 어느 높은 고산지대에 아주 숲이 무성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며 당시 매우 발전했던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좋은 지역의 자연을 하나하나 파괴시켜 나가기 시작했고 끝내는 그 무성했던 좋은 나무들을 다 베어 없애 버렸습니다. 마침내 그 숲은 황랑한 바람만 부는 폐허의 땅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 둘 끝내는 모두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버림받은 그 땅에 '엘제아르 부피'라는 사람이 들어가서 도토리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도토리 100개씩 40년 동안 꾸준하게 심어 나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토리나무가 자라고 그 황무지였던 고산지대가 점점 아름다운 거대한 숲으로 변해가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메말랐던 땅에 다시 물이 흐르고 고기들이 찾아들었으며 새들도 숲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마을을 떠났던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찾아와 비옥한 삶을 살면서 누리게 되었습니다.

홀로 묵묵하게 긴 시간을 일했던 한 사람의 거룩한 땀방울이 이런 놀라운 결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냥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될 때 땅에 떨어진 밀알 한 톨에서 마흔 개가량 이 땅의 씨앗이 맺힌다 그럽니다. 이럴 듯 씨앗 안에는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생명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땅에 떨어져 자기 자신은 반드시 죽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의 빵을 주시는 방식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나름대로 하고 있는 작은 희생 하나하나 그들을 향한 우리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선행 하나하나는 날마다 ㅇㅇ우리 자신을 죽여나가는 삶이요, 그 대신 이 세상은 또 다른 생명 가득 찬 모습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