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잡기(雜記)

친구 송영진을 떠나 보내며

Bravery-무용- 2013. 7. 2. 21:34

나에겐 친구 송영진이 있었다 아니 있다.

 

중,고등학교 동창이면서 40년이 넘은 동창친목회인 "한뜻회"의 같은 일원이다.

 

우리와 같은 40년 후반에서 50년 초반에 태어난 친구들의 학창시절은 모두가 비슷했듯이 웬만한 가정은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한 생활속에서 지냈다.

그 당시에는 수업료를 못내면 수업도 안시키고 수업료가져 오라고 학교에서 내쫓았었다.

수업료 통지서만 나오면 몇 일내로 납부를 하여 넉넉한 집안인줄 알았던 영진이었다.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장남이었기에 부모님이 학교에서 내 아들 기죽는것이 싫어 곧바로 수업료를 납부하였었다고 먼 후일 들었다.

고등학교생활도 나와 같이 도서부에서 활동을 하여 더욱 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 재수를 한답시고 어울렸던 젊은 시절은 공부는 뒷전에 당구배우고 담배피우고 술마시며 돌아 다녔다.

인천에선 동인천역 주위가 가장 번화하여 친구들을 동인천역앞에 있는 다방,당구장,선술집등에서 자주 만났는데 동인천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영진네 집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영진네 집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두칸방뿐인 영진네 집이 건너방 하나는 우리 친구들의 아지트나 다름 없었다.

모친께서 싫은 내색없이 항상 친구들을 맞아주셨기에 친구들 모두 내집 드나들듯 하였다.

 

군대에 입대하여서는 뜻하지 않게 부친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친구는 1977년 동부제강에 입사하였다.

성실하게 근무를 하였기에 2006년에는 대한민국 품질명장의 영예를 앉았다.

대한민국품질명장은 아무나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10년이상 산업현장에서 근무하고 품질분임조 활동경력이 5년이상인 사람가운데 장인정신이 투철하고 품질경영활동에 헌신해온 모범근로자중 선발하여 대통령이 직접 지정패를 수여한다.

현장근로자에겐 최고의 명예인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회사는 친구가 필요하여 계속 근무를 하였으니 그의 투철한 장인 정신이 돋보였다.

 

또한 친구는 자기 몸관리를 철저히 하였었다.

헬스에 수영 그리고 트레킹으로 건강관리를 하면서 빠지지않고 건강검진도 하였는데 이렇게 일찍 우리들의 곁을 떠나니 더욱 애통하고 비통하다.

 

작년 어느날 한뜻회 모임이 있던날.

코가 막히고 불편하여 동네 이비인후과를 다닌다고 하더니 얼마가 지난후 종합병원에서 진단을 받는다 한다. 

그후 듣지도 못한 림프종암(혈액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항상 자신감을 가졌고 나도 그가 더 이상의 전이는 없는걸로 믿었다.

몇 번의 항암치료를 끝내고 퇴원하여 직장까지 복귀하였다.

 

퇴원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서 저녁을 같이할 시간을 가졌다.

의사가 잘먹으라 하였다며 생선회등 날것과 술잔만 기울이지 않을 뿐 왕성한 식욕에 안심을 하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로 만났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잃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었다.

5월달에 들어와서는 점점 힘이 없어 가까운 월미산도 못가고 주말에는 꼼짝없이 집에서 쉬고 있다 한다.

 

그러더니 친구는 6월 중순경 다시 병원에 입원하더니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6월22일 현주엄마로 부터 들었다.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였다.

5월말일 한뜻회 모임에도 참석하여 순대전골등을 맛있게 먹었었는데 말이다.

 

한뜻회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 월요일 저녁에 친구 춘근과 함께 면회를 하였다.

춘근은 병원에 오면서 완쾌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하였단다.

면회는 2명으로 제한하여 나와 춘근이가 먼저하고 종환이는 다음에 하였다.

그 면회가 영진과의 이승에서 마지막 만남이 될줄이야.

눈도 감고 입도 다물었다 목소리 만이라도 들을수 있을까 귀에다 소곤대지만 슬픈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친구 영진은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수녀님으로 부터 대세를 받고 요셉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나도 천주교 신앙을 갖고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랐다.

면회한 날 영진 처와 딸, 종환, 병문 처, 춘근,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가족에는 위로를 영진에게는 완쾌를 바랬다.

 

6월27일 출근하여 영진이와 절친하였던 김선기와 통화를 하며 오후에 함께 병문안 가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수십분 후 병문에게 날벼락같은 연락을 받았다.

영진이가 눈을 감았다고... 오전11시16분

 

장례식장은 백병원 장례식장이다.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어도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친구의 죽음도 세상인심따라 자기에게 이로운 데로만 움직이는가

생각보다 친구들이 보이질 않는다.

동창 친구들이 좋아 동창회도 열심히 참석하였던 영진이다.

부회장도 하였고 아픈 몸으로도 금년 5월 동창회등산대회도 참석하였었다.

 

6월29일 6시30분  장례식장에서 출관예절을 갖추고 7시 화수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렸다.

    <이 세상 떠난 형제>

이 세상 떠난 형제 받아 주옵소서

이제 주를 섬기려 새날을 맞으니

내 주여 당신 종을 축복해 주시고

먼 길 떠나간 형제 받아 주옵소서

 

미사후 운구차는 친구의 집을 거쳐 졸업한 송현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회사 정문에서 잠시 멈췄다.

부평승화원에 도착하여 한줌의 재가 되기까지는 2시간이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것이다.

친구 송영진이는 그렇게 속절없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잘 있어라는 말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한다.

송씨 집안의 기둥으로써 무던히도 친적간의 우애를 위하여 애썼던 송영진 친구.

이승의 모든 시름과 고통을 다 털고 갔겠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이 인생이라지만 세상은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일.

그래서 아둥바둥 애를 쓰며  최선을 다하여 살았던 친구 송영진 잘 가게나.

천국에서는 모든 고통과 시름 다 내려놓고 미소지으며 살게나

 

                                                                  2013년 6월 30일

 

                                                               그리움에 친구 김무용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