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잡기(雜記)

친구 박한호를 만나고 싶었다

Bravery-무용- 2012. 8. 21. 11:32

나에게는 친구 박한호가 있다.

한호의 고향은 경남 진주쪽이고 나보다는 나이가 2살위지만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한호는 머리도 뛰어나면서 노력형의 친구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때 함께 학생회 간부를 하였었는데 여름방학 학생회 간부들의 여름캠프가 대천해수욕장에서 있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잠도 못들고 약속시간보다 일찍(새벽4~5시경으로 생각된다) 한호집으로 찾아갔는데 캠핑떠나는 날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있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졸업식때는 가장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받았다.

또한 집도 우리집과 이웃하여 연세가 많으셔 할머니 같으셨던 한호 어머니, 형님 그리고 우리에게 잘해주셨던 개똥이 엄마로 불리였던 형수님, 나보다 한살 아래였던 동생 한탁이도 모두 잘 알고 지냈다.

대학생활 하면서도, 사회생활하면서도 우정은 변치 않았다.

그 세월이 어느덧 49년.

젊었을때는 객기로 돈한푼없이 동인천역앞 용동의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도망가 잡혀 파출소에 끌려갔었던 추억도 있었도 고성방가하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법원까지 가 즉심에서 벌금을 냈었던일도 있었다.  

배우자도 나와 같이 인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였었다.

내가 80년대초 집을 마련할때 부동산에 어두운 나는 빌라로 입주할려 하였는데 한호의 조언으로 아파트로 입주하여 나에게 득을 가져다 주었다.

사업자금이 부족할때, 집을 구입할때등 내가 어려울때 항상 도움을 주었다.

박한호는 아이엠에프 한파가 우리나라에 닥쳤을때 다니던 리스회사의 부장직을 그만두고  자기사업에 몰두하였다.

수년전부터 바지선을 시작으로 해운사업에 뛰어 들었고 친구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3년전에는 내가 처음으로 한호에게 천여만원의 돈을 빌려주어 줄곧 한호에게 신세만 졌던 나에게는 어느정도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한호가 2년전부터 군산에 내려가 배사업을 하니 자연히 인천과 멀어지더니 40여년을 함께하였던 남우회 모임에도 작년부터 발길이 끊어졌다.

핸드폰을 하여도 연결이 잘되질않아 목소리조차 듣기도 어려워졌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레서 이번 여름휴가는 박한호를 꼭 보고싶어 아내에게 먼저 이해를 구하였다.

아내와 함께 1박2일 거제도 여행을 끝내고 구조라에서 고현까지 1시간,

거제(고현)에서 진주까지 1시간30분걸려 진주에 도착하여 다시 전라북도 전주행 버스로 갈아탔다. 남원등 여러 경유지를 거쳐 4시간 가까이 걸려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서 군산까지는 1시간여 거리다.

거제에서 한호를 만나기 위하여 버스를 4번 갈아타고 7시간30분이 걸렸다.

 

군산에 도착할때까지 박한호에게 깜짝 놀래기 위하여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다.

저녁 8시 조금지나 군산터미널에 도착하였다.

핸드폰을 하지만 받지를 않는다. 걸고 걸고를 수없이 하지만 받을수 없다는 안내만 들린다.

인천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이번에는 없는 반호라는 안내소리만 들린다.

틀리는 집전화번호는 아니다. 그럴리가 없는데......

왜 이렇까 수 없이 되새기며 마음이 불안하다.

지금까지 말없이 동행하였던 아내가 박한호씨를 만나기가 힘드니 인천으로 가는것이 좋겠다고 한다.

인천가는 버스는 떨어졌고 시외버스터미널 바로옆에있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밤10시40분 조금지나 센트럴시티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교대역2번 출구에서 연수동행 막차 직전의 차에 오른다.

꼭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싶었던 박한호 만나질 못한 아쉬움에 집에 도착하고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다음날 박한호와 통화하였다.

얼마나 안도가 되고 반가웠던지.

핸드폰을 받을수 있는곳이 아니라 못받았다며 나에게 여러번 전화온 것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웠다.

항상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군산 선유도여핼때 다시 찾아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