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기(2010년)

지리산 둘레길 4번째(운봉읍에서 인월면까지)

Bravery-무용- 2010. 9. 9. 22:01

 

 

2010.9..5

지리산 둘레길(운봉읍-서림공원-신기마을-비전마을-군화동-흥부골 자연휴양림-월평마을-인월면)

태화산우회

 

오늘은 4번째 지리산 둘레길에 나서는데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한다.

인천에서 출발한 버스는 얼마 남지않은 중추절에 벌초를 하기위하여서인지 고속도로 하행선이 지체되면서 예정시간을 넘겨 10시30분경 운봉읍 우체국앞에 도착하였다.

우체국,파출소,농협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만 읍이다.

하늘을 올려보면 높고 푸르고 구름은 옅게 깔려있고 햇볕은 따갑게 내려쬐는 전형적인 가을하늘이다.

여자산우들은 배낭을 챙기기 보다는 넓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오늘 둘레길 걷기전에 준비사항이 되었다.

농협건물을 꺽어져 들어서면 운봉초등학교앞이고 학교앞에 매달려있는 인월방면따라 학교 담을 끼고 걸으면 남원과 함양,인월로 가는 24번 국도가 나온다.

국도를 건너면 둘레길을 알리는 말뚝이 세워져 있다.

말뚝에는 이곳의 위치는 운봉읍,그리고  운봉,인월 1로 표시되여 있는 것으로봐서 운봉-인월구간의 시작점인 듯 하다.

말뚝에 표시된 빨간화살표 따라 걸어야 한다.

100여미터를 걸으면 서림정과 충혼탑이있는 서림공원이다.

뒤돌아보면 읍내뒤로 지리산 서북능선이 길게 이어져 보인다.

서림공원은 먼저 좌우로 한 쌍의 돌장승이 버티고 서있는데 남쪽의 돌장승은 남자로 진서대장군, 북쪽의 돌장승은 여자로 방어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두장승 모두 벙거지를 쓰고 수염이 달렸으나 여자 장승에는 귀가 없다.

여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민속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장승은 민속자료 제20호다.

당산나무 아래로는 재단이 마련되어 있고 주위는 선정비와 불망비, 어사선덕비, 갑오토비사적비,6.25 충혼탑등이 세워져 있고 모정 서림정(西林亭)이 있다.

서림정뒤의 숲은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되어 마을의 머리와 같이 대대로 신성시 되는 곳이므로 석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서림공원을 한바퀴 둘러보고 서림교는 건너질 않고 행정마을 2.6키로, 비전마을 3.7키로가 표시된 말뚝따라 왕벚꽃나무가 늘어선 람천의 제방길로 들어선다.

제방길을 걸으며 운봉의 넓은 들녘에서 빙돌아보면 앞으로는 황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백두대간중에 한 봉우리 고남산이 중계탑과 함께 보인다.

백두대간은 고남산에서 동쪽으로 매요리와 가산리를 얕으막하게 지나 시리봉, 봉화산으로 뻗어 북으로 달린다.

우측으로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펼쳐지는데 걸으면서 덕두산, 바래봉,새걸산의 줄기를 그리면서 2005년과 2008년에 성삼재에서 바래봉, 운봉까지 걸었던 서북능선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북능선은 그리 높게 보이질 않지만 서북능선길을 걸으면서 내려다 보았던 운봉은 왜 그리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는지 모르겠다.

머리위로는 가을 햇살이 쏟아지지만 산들산들 부는 강바람에 코스모스등 들꽃들은 춤을 추고 태풍 콘바스에도 끄덕없이 고개를 숙이고 익어가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걷는길 마음이 넉넉하면서도 가볍다.

람천위 신기교를 건너며 매요마을 표시석이 세워져 있는 조그만 뒷산은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숲을 만들어 놓고있다.

매요마을 표시석 건너에는 또다른 마을 표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신가마을방향을 알린다.

신기마을 표지석에서 완전히 꺽어져 논과 논사이의 도로로 들어서면 마을 길이지만 둘레길은 제방위로 오르면서 람천과 함께 걷는다.

서림공원에서 신기교까지는 람천을 좌측에 두고 걸었고 신기교를 지나서는 람천을 우측에 두고 함께 걷는다.

신기교를에서 어느정도 걸으면 황산과 지리산서북능선은 우리와 함께 계속 같이 걷고있지만 뒤돌아 보면 고남산은 마을의 작은산들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람천둑에는 수 십그루의 편백나무가 보이고 걷는길 좌측으로는 황금들판 너머로 신기마을이 보인다.

신기마을의 유래다.

선조28년(1595) 임진왜란이 휴전상태때 안동 장씨 장덕복(長德福)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운봉고원이 마을을 보호하고 만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명당터인지라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새터(신기 新基)"라 하였고 소(牛)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을 쌓았다 한다.

람천위 사반교를 건너서 제방길로 들어서면 다시 람천은 좌측에서 흐른다.

고추잠자리떼들이 낮게 날다가 이파리없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데 뒤로는 서북능선이 구름과 맞닿아 있는데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은빛억새는 하늘거리고 가을 들꽃과도 눈을 마주치고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는 염소가족도 만나는  제방길을 다붓하게 걷다보면 화장실이 있는 넓은 주차장에 닿고 곧바로 다리를 건너 황산대첩비지앞에 멈춘다.

황산대첩비는 사적 제104호로 이성계, 이두란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승전비는 1577년에 건립했으며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고 비각은 1667년(현종8년)에 현감 허제가 건립하였으나 왜정때 파괴되고 지금은 파편만 남아있다.

황산대척비지를 둘러보고 산우들이 기다리는 비전마을 쉼터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큰 고목나무 두 그루 그늘을 만들어주고 바람도 살랑대며 불어주니 나무그늘 아래 널평상 에 누워서 쉬는 산우도 보인다.

비전마을은 황산대척비가 세워지고 비각을 관리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마을이 비碑앞에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 비전(碑前)마을이다.

또한 마을 5리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척비를 지날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앞에서 절을 하였다 한다.

또한 비전마을은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들이 상주하던 곳으로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 성지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비전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것이 이곳 하마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곳으로 그 시대의 초가 형태를 복원한 곳을 둘러본다.

30분이상을 비전마을 쉼터에 머무르고 마을을 떠난다.

제방옆 도로변에는 큰 정자나무가 서있고 황산교는 건너지 않고 곧바로 제방길을 걸으면 우측으로 멀리 남원국악성지가 보이고 조금만 더 걷다보면 군화마을이다.

군화마을이라고 부르게된 뜻은 1961년 대홍수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후부터 "군인들이 지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軍花)마을이다.

군화리 마을 입구 느티나무 정자를 지나 아스팔트길따라 오르다 보면 도로변에 불상이 보이고 군화동 버스정류소가 보이면 24번 국도다.

제방길은 이 지점에서 끝났고 운봉에서부터 5.8키로미터를 걸었고 인월까지는 3.6키로 남았다.

24번국도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화수교다리를 지난다.

화수교는 인월면과 운봉읍을 경계한다.

화수교가 끝나는 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대덕리조트길로 들어선다.

화수교에서 람천을 내려다 보면 강처럼 넓은 폭으로 흐르며 24번 국도와 함께 한다.

대덕리조트를 가로잘러 둘레길 말뚝따라 옥계호 큰빗돌이 세워진 옆으로 차단된 시멘트도로로 들어선다.

게곡전체를 시멘트로 발라놓은 수로는 옥게저수지물이 람천으로 흘러 내리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옥색의 소를 만들고 있다.

휘어진 비탈진 옥계저수지 아랫길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아주 멀리는 고남산이 보이고 걸었던 람천의 제방길도 조금은 내려다 보인다.

옥계저수지는 출입이 금지되여 깊이를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닫혀진 철문앞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자락의 산봉우리들이 저수지 물위에 푸르게 반영되여 보인다.

옥계는 운봉의 비경을 꼽는 운성10경에서 옥류청류로 불린 물맑은 계곡으로 신라 경덕왕때의 악사로 지리산 운산원에서 50년동안 거문고 기법을 닦았다는 옥보고선생이 여기서 거문고를 탔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옥계저수지로 조성되여 있다.

시멘트길이 끝나면서 임도가 시작되는데 길은 게속 오르막이다.

아주 가파른 오르막은 아니지만 오랜시간을 걸어서 인지 숨은 가쁘지는 않지만 힘이 부치다.

힘이 부치여 여자산우 한분은 배낭을 대장에게 건네준다.

차량도 다니는지 아주 드물게 도로표시판도 세워져 있다.

둘레길 말뚝에 운봉,인월20 쓰여있는 지점에 오르면 오랜만에 시야가 트이면서 산허리 아래로 인월면이 내려다 보인다.

이제는 모퉁이를 돌때마다 인월면이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다시 시멘트길이 시작되는데 내려가는 길로 아래는 흥부골 자연휴양림이 보이고 휴양림위로 앞봉우리 너머 덕두봉이 보인다.

휴양림내 원두막에 태화산우들이 모두모였다.

나보다 앞서 걸었던 아내는 비전마을 쉼터에서 보곤 처음으로 만났다.

모두들 배낭속에서 먹거리를 꺼내 진수성찬을 벌리니 우선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막걸리까지 들이켜 갈증을 달랜다.

산우들 모두 넉넉하고 정이 넘쳐나는 먹거리판을 끝내고 휴양림을 떠나 덕두교를 지나고 도로좌측에 유심히 살펴야지만 보이는 둘레길 말뚝따라 아스팔트길에서 오솔길로 들어선다.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면 운봉,인월26 둘레길 말뚝을 지나 동네 뒷길로 내려선다.

달오름길 마을 골목을 나오면 월평마을,28 둘레길 말뚝에 인월 0.3키로, 운봉 9.1키로 방향표시도 세워져있는 달오름마을 회관앞이다.

월평마을은 1800년대 후반 천석꾼 운봉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달형이라 월평이라 불렀다는 설과 마을터가 동쪽을 향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하여 월평이라 했다는 설도 있는데 "달과 지리산의 청정한 기가 함께 올라가는 곳"이란 뜻으로 금년 7월15일 달오름마을로 바뀌었다.

보기드물게 개잎갈나무(설송)가 마을의 가로수다.

마을의 주택들이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하여 민박들을 하고있는데 민박집 이름들이 세워져 있다.

일광정 모정을 지나 구인월교를 건너기 직전 좌측으로는 영월정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지리산 둘레길이 이어지는 금계마을 19.8키로 둘레길 말뚝이 세워져 있다.

구인월교를 지나 우측으로 꺽어지면 인월정정자가 있는데 정자에서 마을분들과 이야기를 들으며 덕두봉등 설명을 듣는데 마을분들이 노고단이라 일컫는 곳은 천왕봉방향에 가깝다는 설명을 나중에 지리산 안내센터 직원으로부터 듣는다.

안내센터내를 들러보며 모금함에 만원을 집어넣어 지리산둘레길 발품값을 지불한다.

태화버스가 주차되여 있는 하우마을 입구 정자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며 산우의 정을 쌓는다.

4번째 지리산 둘레길 운봉읍 서천리 운봉사거리에서 인월면 인월리 구인월교까지 약 17,000보를 걸어 뜻있게 마무리를 한다.

같은 인월면에 속하는 월평마을에서 매동마을까지는 걷지를 못하여 언젠가는 걸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