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기3

노산 이은상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다시 찿은 무등산

Bravery-무용- 2009. 12. 31. 10:55

2009.12.27

광주 무등산(1,187 M)

태화산우회와 함께

 

인천을 출발한 2대의 산악회버스는 9시50분경 무등산 도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눈 산행을 기대하였던지 오랜만에 2대의 차량이 움직였지만 주차장에서 올려본 무등산의 모습은 눈이 보이지않는 나목의 겨울산 모습이다.

많은 인원이라 통제가 힘들어 미리 4시까지 도착바란다는 대장의 멘트를 들으며 출발을 한다.

주차장에서 증심사와 약사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는 06년1월에 찿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많은 음식점들이 정비가 되여 없어지고 집단지역을 만들어 현대식상가로 바뀌었고 오늘도 도로 정비는 계속진행하고 있다.

무등산의 첫 절 문빈정사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한겨울 뼈속 깊이 추위를 겪지않고 어찌 봄날의 매화향기를 얻겠는가?"

몇 번이고 현수막의 글귀를 되새기며 증심교와 신림마을 빗돌이 세워져있는 다리를 지난다.

우측으로는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의 문화유적지가 보이고 조금만 더 오르면 해발 190M 증심사입구 삼거리 앞이다.

이곳 삼거리는 증심사, 중머리재와 약사사, 새인봉으로 갈라진다.

06년도에는 약사사방향으로 올라 중머리재로 오른 기억이나 오늘은 증심사방향으로 산길을 잡는다.

또한 증심사방향은 약사사방향보다 중머리재로 오르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증심사가 자리잡았다.

해발220M 중머리재까지는 2.0Km 표지목이 세워져있다.

증심사는 철갑선사 도윤이 신라 현안왕4년(860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무등산기행"에서 증심사에서 1박을 하면서 무등산을 올랐는데 시를 쓰셨다.

 

산사에 밤 깊으니 물 소리 더욱 차다

어질은 온갖 생각 흘러 멀리 보내고서

눈감고 마음머리를 손 끝으로 만지노라

 

증심사를 지나면서 해발300M에 이르면 당산나무앞이다.

몇 사람이 손을 마주잡아야 감길 만큼 큰 고목으로 마을을 지켜 주었던 당산나무가 주위에는 나무의자등이 마련돼 있어 이제는 무등산을 찿는 모든 사람들의 쉼터 역활을 하고있다.

몇몇 산우들과 당산나무에서 다리쉼을 하고 돌계단을 오르며 구 대피소를 지나고 만만치않게 돌계단을 어기적대며 오르면 우측으로 추모비가 보이고 주위는 나목아래 키작은 죽순이 초록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번 다리쉼을 하고 돌계단을 계속오르면 해발 586M 중머리재다.

11시40분 주차장에서부터 2시간 채 못미쳐 중머리재에 오른 것이다.

중머리재 이정표에는 장불재방향과 새인봉방향 그리고 증심사,토끼등 방향이 표시되었다.

중의 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중머리재는 겨울바람 답지않게 땀을 식혀줄 정도로 불며 한없이 높은 하늘에 넉넉하게 우리를 반겼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위에서 손짓을하고 새인봉에서 오는 서쪽 능선길 좌측 멀리는 거짓말같이 영암의 월출산 천황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광주시내는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주위를 돌아보며 풍경에 빠져있는데 새인봉삼거리를 거쳐오는 산우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리를 잡고 먹거리를 펼치며 모습도 담고 풍경을 바라보며 눈 산행을 못하여 아쉬움을 크지만 높고 맑은 하늘아래에서 모두들 즐거움을 만끽한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무등산기행"에서 중머리재를 절펀한 초원이라 표현 했다.

 

노산 이은상선생의 제2일째 등산 일정은 다음과 같다.

증심사-약사암-천재등-중머리재-물통골-용추-서석-입석-장불치-지장암-보희석굴-규봉암  산행50리

제3일

규봉암-지공터널-뢰옹굴-상봉입석-함품이재-충장공주O동-원효폭-원효사  산행30리

 

20여분이상을 중머리재에서 휴식을 갖고 장불재로 출발한다.

갈대밭사이 테크길과 돌계단 그리고 너덜지대도 걷다보면 용추삼거리 이정표앞이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중봉으로 갈 수 있다.

해발이 높아지면서 산길은 내렸던 눈이 얼어있어 조심스럽게 오른다.

우측으로 바가지2개가 놓여있는 옹달샘에서 시원하게 한 모금을 마시고 너덜길을 계속올라 군용도로위에 올라선다.

도로를 건너면 해발900M 장불재를 알리는 빗돌이 큼직히 세워져있다.

장불재는 광주와 화순의 경계가 되는 고갯길이다.

장불재는 고갯길이라기 보다는 넓은 고원같은 느낌을 주며 대피소와 통신탑도 세워져 있다.

펑퍼짐한 곳에는 네모난 바위를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좌측으로는 입석대가 조금 떨어져서는 서석대가 보이고 앞으로는 규봉이 봉긋하다.

무등산은 전북 진안 주화산에서 전남 광양 백운산까지 도상거리 398.7 Km에 이르는 호남정맥 한가운데 있는 산이다.

오늘 장불재에서 입석대 그리고 정상 못미쳐 출입통제까지는 호남정맥 능선길이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무등산행기"에서 장불치(재)명칭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장불치는 장불동이라고도 적혀있으나 지금 여기사람들은 장골재라 부르고 장골은 긴골이라 하고 그 골위에 있는 고개라 긴골재 즉 장(長)골재라 부르던 것이 장불사가 생기면서 장불치라 써온것 같다고 적혀있다.

 

중머리재보다 높아서인지 바람은 세게불고 조금씩 하늘은 찌푸러지지만 그래도 산우들 떠날줄을 모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장불재를 떠나 억새밭사이로 돌로 다듬어 놓은 길을 오르면 좌측으로는 주목나무 지역이 형성되여 있다.

천연기념물 465호로 지정된 무등산 주상절리대에 대한 해설판이 세워져있어 내용을 읽고 입석대 전망테크길을 올라 전망대앞에 섰다.

7천만년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형성되었다는 기둥모양의 입석대.

10~15M정도로 돌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자체가 대단한 규모다.

천년기념물 465호로 서석대와 함께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또한 제주 중문절리대는 현무암으로 되여있고 무등산 주상절리는 안산암으로 되어있단다.

"무등산기행"에 이은상 선생은 입석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쓰셨다.

"어허! 이 기장한 광경좀 봅시오. 몇 길씩 몇 십길씩되는 총석이 상봉이 되어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혹은 3동, 4동을 받은자, 전각 기둥같이 둥글은자, 그리고 혼자 우뚝 외따로 선자에 모여서 붙어서 떨어질 수 없는자, 이 기걸하고 장엄한 경관은 물을 것도 없이 이 산의 대표적 존재라 할 <立石>입니다. 이 입석중에서도 최고한 일봉을 천주봉이라 부른다."

또한 노산은 입석의 기를 노래하고 입석의 덕을 찬양하였다.

 

천만년 비바람에 깍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양이 죽은듯 살은양이

찌르면 끊는 피 한줄 솟아 날듯 하여라

 

입석대 전망대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돌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장불재는 저 멀리 멀어져 있다.

산길 좌측으로 약간 비껴 돌면서 바위위로 오르면 입석대의 뒷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전망대에서 보았던 입석의 모습과는 다르게 4각내지 6각의 윗모습만 보이고 좌측 아래로는 마을과 동북호가 그리고 무등산 백마능선이 펼쳐진다.

암봉에서 내려와 테크길 따라 오르다 보니 양지쪽에 먼저 도착한 산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등산 정상은 계속 오르야 하지만 이곳에서 부터 군부대가 주둔하고있어 출입을 할 수 없다.

또 한번 산우들과 정겨운 시간을 갖고 능선을 넘어서니 무등산 옛길 종점 표시목이 세워져 있고 날씨는 지금까지와는 사못 다르게 바람도 세차고 산길은 눈과 얼음이 꽁꽁얼어 있다.

눈과 얼음길을 내려가기위하여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고 서석대전망대 화살표방향으로 내려간다.

광주시네는 멀리 네려다 보인다.

돌계단에 눈얼음이 덮여있어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길은 관목의 진달레 길이다.

내려가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서석대 전망대다.

서석대는 해발 1,100M에 있으며 천연기념물 465호로 한반도 육지에서는 가장 큰 주상절리다.

서석대는 저녁노을이 물들때면 수정처럼 반짝인다하여 수정병풍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서석을 바라보시며 본인은 고궤객이라며 시를 쎴다.

 

고궤객 한 많은 사람 쉬어가라 하시오니

남무(南無) 서석 여래불(如來佛) 무엄(無嚴)한채 밟고 잡고

기대어 던진 막대 다시 들줄 모릅니다

 

서석의 경관을 보시고 떠나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 눈얼음길을 내려와 군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내려왔다.

군도로를 가로질러 해발880M 중봉복원지입구를 지나 억새밭사이 등산로를 걸어서 중봉에 도착하였다.

해발 915M 묵직한 자연석을 세워놓은 바위에 정상표시를 하였다.

중봉에서도 사위를 둘러보기에 그지없이 좋다.

정상은 올려다 보이고 광주와 화순방향은 내려다 보인다.

겨울바람을 맞으면서도 중봉을 배경으로 얼굴을 디카에 담고 안테나가 보이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헬기장을 지나 광주방송과 MBC송신탑 사이로 내려가면 동화사터상단 표시목앞에 선다.

표시목에는 서석대,중봉과 용추봉방향 표시만 되여있어 20여분을 길을 잘못들고 다시 표시목지점으로 되 올라 방향표시가 되여있지 않은 산길로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알았지만 방향표시가 없는 산길이 토끼등과 증심사로 가는 길이다.

능선을 걷다가 좌측 돌계단으로 내려가면 동화사터 샘터가 나타난다.

내려가면서 쌓였던 얼음눈이 점점 줄어들어 착용하였던 아이젠을 벗는다.

동화사터 샘터위 능선위에서 부터 계속이어지는 돌계단길을 30여분 내려와 토끼등위에 도착하였다.

넓은터에 간단한 체육시설도 있는 토끼등 같지않은 토끼등이다.

덕산너덜 해설판에서 내용을 읽으며 나목사이로 보이는 덕산너덜을 올려본다.

토끼등에서 증심사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군락지로 소나무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30여분을 내려오면 아스팔트도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출발때 대장이 당부하였던 4시가 훌쩍넘었다.

 06년1월 무등산 등산을 끝내며 다시 한번 찾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노산 이은상선생의 "무등산기행기"에 쓰여있던 지명과 설명 그리고 시를 느끼며 걸었던 값진 무등산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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