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하여 정착한 김천시 대덕면 덕산 1리는 덕산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이며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휴락산방(休樂山房)은 덕산재에서 내려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하얀 주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덕산 1리 마을에 살면서 대덕산과 덕산재를 그냥 산이고 고갯마루다 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으로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고, 해당 관서에 전화 문의도 하고, 국민 신문고에 질의를 하여 답변도 받고, 마을 분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덕산재를 이야기합니다.
해발 644M 덕산재.
30번 국도가 통과하는 덕산재는 김천시 대덕면 덕산 1리와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를 경계하는 고갯길이기에 넓게는 경상북도 김천시와 전라북도 무주군을 경계합니다.
조선시대부터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는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을 무풍을 꼽고 있는데 그 길지로 꼽히는 무주군 무풍면과 김천시 대덕면이 연결된 고갯길이죠.
덕산재는 남쪽 방향 대덕산과 북쪽 방향 부항령, 삼도봉을 이어주는 백두대간 능선 위에 있는 고갯마루로 산꾼들에게는 들머리이기도, 날머리이기도 한 중요한 고갯마루가 되기도 합니다.
덕산재를 알리는 큰 빗돌은 산림청에서 2006년 10월 18일에 세웠는데 뒷면에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줄기로서 국토의 근간이자 자연생태의 보고이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다양한 동식물의 보금자리가 되는 민족정기의 상징이다. 백두대간의 가치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백두대간을 더 아름답게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담아 영호남의 경계이며 백두대간 마루금인 덕산재에 이 표지석을 설치한다" 고 쓰여있습니다.
덕산재 동쪽 사면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김천시 감천으로 흘러들어 가 낙동강으로, 고개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금평천은 무주 남대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한 산행객의 산행기를 읽어보면 1998년 5월 덕산재에는 쌍방울 주유소와 매점이 있었다 적혀 있었고, 2000년 이후에 올려진 산행기는 매점을 겸한 주유소가 대덕산 산삼 집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대덕산 산삼 집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덕산재에는 "백두대간 이정표", "산행 안내판", "백두대간 덕산재를 알리는 세로 석의 큰 빗돌" 등은 모두가 덕산재로 명기되어 있는데 유독 남원 국토관리사무소에서 세운 안내판은 "여기는 대덕재 정상입니다(해발 644m) "로 되어 있어 남원 국토관리청으로 문의를 하였더니 담당자는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떤 분이 대덕재라 하였다 하여 그 말을 듣고 세웠다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이정표의 명칭을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고 세웠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느냐, 모두가 덕산재로 부르니 통일된 명칭 덕산재로 안내판을 바꾸는 것이 맞지 않느냐? 그리고 인터넷에 대덕재를 검색하면 검색창에 전혀 나오지도 않고 Tmap이나 내비게이션에도 대덕재는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였더니 검토해 보겠다고 답을 하였지만 두고 볼 일입니다.
조선 후기 1751년(영조 27년)에 쓰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무풍령(舞豊嶺)이 나옵니다. "속리산 아래 있는 화령과 추풍령과 황악산 남쪽에 있는 무풍령은 작은 영이고,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치, 팔량치가 큰 영이며 여기를 지나면 지리산이 되었다." (擇里志 山水편)고 적혀있습니다. 시인이며 무주 향토사 연구회장 유재두는 택리지의 이 글을 인용하며 무풍령이 대덕재(덕산재) 임을 알 수 있다 했습니다.
1861년(철종 12)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 절첩식의 전국 지도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덕산재를 주치(朱峙)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지례에서 무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1918년의 "조선지형도"에는 주치령(走峙嶺)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치령은 옛날에 산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만약 고개를 넘다가 산적이 나타나면 고개 아랫마을로 빨리 달려와야 살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대동여지도의 주치는 붉은 주(朱), 산우뚝 치(峙), 조선지형도에는 달릴 주(走), 산우뚝 치(峙)로 표시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유추를 하여보면 대동여지도의 주치는 무주(茂朱)로 넘어가는 고개이기에 주치(朱峙)라 하였고, 조선지형도에서는 실제로 도적 때들이 있어 주치(走峙)라 부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마을분들은 지금도 덕산재를 주치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동여지도나 조선지형도에는 주치라고 불리었는데 지금도 덕산 2리를 옴배미라 하기도 하고 주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덕산재 즉, 옛 지명인 주치령 밑에 있어 주치라 붙은 이름입니다.
한편 덕산재라는 이름은 네이버 지식백과(덕산재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에 의하면 고개 아래에 있는 우리 마을인 덕산 마을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언제부터 주치가 덕산재로 불리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덕산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남면 덕산이라 불리었다가 지금부터 105년 전, 1914년에 덕산과 주치가 통합하여 덕산리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을 분이 덕산재와 한국전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덕산리 마을을 지나 덕산재를 올라가야 하는데 퇴각을 하면서 소달구지에 식량 등을 가득 싣고 가풀막진 고갯길을 오르니 퇴각 속도가 너무 느려 소와 함께 소달구지에 싣고 가던 식량 등을 마을 길가에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전쟁통이니 식량은 부족하였을 테고 마을 주민들은 버리고 간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합니다.
휴락산방에서부터 덕산재까지 걸음걸음 올라 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요. 아내와 함께 걷습니다. 지름길인 뒷길로 가질 않고 휴락산방 정문을 나와 빙돌아 30번 국도에서 덕산재로 향합니다. 바로 도로 건너는 도로 지명 <덕산 1길 1>을 부여받은 김백환 님 댁입니다.
오르면서 좌측에는 바랑골 약수암 빗돌이 세워져 있고, 약수암 빗돌 뒤에는 1907년에 세운 효부 김해 김 씨, 열부 경주 이 씨 양부인 사적병견립비(孝婦金海金氏, 烈婦慶州李氏 兩婦人 事蹟竝堅立碑)가 세워져 있는데 길손들로 하여금 효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세워졌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첫 번째 굽잇길 도로를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면 우측 가까이는 휴락산방이 내려다 보이고 그 위로는 듬직한 대덕산과 초점산이 우뚝하며, 덕산 1리 마을은 평온하게 보이고 마을 위 신선봉 정상의 암봉이 봉긋합니다.
겹겹이 겹쳐진 산줄기들이 멀리는 가야산에서부터 단지봉, 수도산, 월매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의 산줄기가 물결을 일으킵니다.
좌측으로 굽잇길을 돌면서 오르면 김천시 덕산재 근린공원입니다. 오석(烏石) 큰 빗돌에 김천시 로고와 덕산재 해발 644m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단풍나무와 반송 등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형 파고라도 설치되여있어 한 여름에는 트레킹(trekking)하다, 자전거 라이딩(riding)하다, 자동차 운전(drive)하다 공원에서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쉬었다 가기 안성맞춤 공원입니다.
공원을 지나 돌며 오르며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면 하얀 집 휴락산방이 깊이 내려다 보이며 보이지 않았던 거창 방향의 산들이 보입니다.
계속 오르면서 좌측으로 돌면 도로는 아니면서 포장이 되어있는 공원 같은 곳이 나오고 조금만 오르면 좌측으로 주능선에서 뻗은 작은 능선이 있는데 그 주위 어느 지점이 지번 덕산리 산 22-4입니다.
산 22-4에는 삼국 시대의 성(城)으로 추정되는 덕산리 주치 산성(德山里走峙山城)이 있는데 확인 가능한 성의 길이는 100m 정도로 성 높이는 1m 내외이고, 폭은 3m 정도의 토성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출처;디지털 김천문화대전,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또다시 돌아 오르면 도로 우측으로 공원같이 꾸며 놓고 경상북도 김천시를 알려주는 조형물이 대리석 받침대 위 오석판에 말갈기와 꼬리털을 세우고 혀를 길게 내밀며 힘있게 달리는 예사롭지 않은 말의 형상이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조형물의 뜻과 조각가 등 궁금하여 2019년 9월 21일 국민신문고에 질의를 하였더니 2019년 10월 2일 경상북도 자치행정국 새마을 봉사과에서 답변이 다음과 같이 왔습니다. 요점을 정리하면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천마도를 형상화한 것으로 시․도 접경지역 안내․홍보를 위해 2006년경 김천시에서 설치한 것으로 김천시 대덕면 조형물은 2006년 10월에 김천시에서 열린 제87회 전국체전과 2007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및 ‘경북 방문의 해’를 맞아 관광경북의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형물을 만든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설치된 지 10여 년 이상 경과되어 현재는 알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원하게 답변을 받아 고맙다는 감사의 회신도 하여주었습니다.
휴락산방에서 출발하여 덕산재까지 약 1.5Km에 30분 정도 걸었고 고도 차이는 약 120M입니다.
덕산재 주위를 둘러보면 김천시 백두대간 안내지도 입간판과 무주군 관광안내도 입간판이 세워져 있고, 백두대간 등산로 이정표에는 북쪽 방향은 부항령 5.2Km, 삼도봉 12.6Km, 남쪽 방향은 대덕산 3Km 표시되어있고, 백두대간 덕산재 해발 644m가 화강석에 음각되어 세로로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어떤 산꾼이든 이 화강석 앞에서는 기념하기 위하여 포즈를 취할 겁니다.
십승지 무풍을 알리는 세움판도 세워져 있으며 태권도원 무주도 알리는 표시석도 보이고 경상북도 김천시와 전라북도 무주군 도계를 구분하여주는 표시판도 세워져 있습니다.
덕산재에서 무풍 방향은 나뭇가지 사이로 계부 소류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곳은 금평리 반딧불이 보호구역입니다.
무주 방향으로는 동물 이동통로만 보여 큰 정겨움을 못 느끼는데 동남쪽 대덕면 덕산리 방향은 구절양장 굽잇길이 깊게 내려다 보이고 가야산과 수도산 등 고산 준령의 산들이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 보이는 풍경이 그지없이 좋습니다.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1월 1일에는 김천 대덕면과 무주 무풍면이 모여 영호남 화합 해맞이 행사를 거행합니다.
금년 1월 1일 귀촌 후에 처음 맞는 해맞이 행사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대덕면과 무풍면 주민뿐 아니라 각지에서 모여들어 차량들과 사람들이 덕산재를 가득 매웠으며 일출이 시작되면서 덕산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가족의 건강, 행복 그리고 소망을 기원했을 겁니다.
영호남이 하나가 되어 화합하는 덕산재 고갯마루는 어떤 재보다 더욱 뜻이 있는 고갯마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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