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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왜 사는가 (분도소책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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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사는가(이노우에 요지)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정신과 의학자 빅터 프랑클이 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비극을 통해 나치의 잔학한 행위를 고발한 작품. "밤과 안개"(우리나라에서는 죽음의 수용소) 수용소 체험의 결론으로 인간이란 의미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결코 견딜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일지라도 그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들은 그것을 짊어지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쪽
자기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비는 단계입니다. 자기 이익을 비는 단계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자기가 바라는 바에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클이 말 한것 같이 관점이 전환되는 단계는 자기가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세계가 아니라 그분이 주(主)가 되고 자기는 종(從)이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학문과도 예술과도 그리고 도덕과도 다른 종교 고유의 세계라고 생각됩니다. 빈털터리가 되고, 살 기력이 없고, 아파 누워 있고,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어져 빛바래고 말았을 때에도 그런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의를 부여하며 살라는 것이 프랑클의 이야기입니다. 17, 18쪽
나의 인생은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20쪽
자기 욕구에 하느님을 따르게 하려는 겁니다. 이것을 빌고, 저것을 빌고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하느님은 좋고 들어주시지 않으면 그런 하느님은 어디로든지 가버리라는 것이지요. 21쪽
언제나 한가하게 부채질이나 하고 안락한 기분이 된다면 사람은 아무도 정신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22쪽
구약성서란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성전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유대교에서 빌리고 있는 셈이지요. 22쪽
구약성서 욥기 이야기 23쪽
배가 정확히 닺을 내리고 있어 안도감이 있어도 폭풍이 불면 배는 좌우로 흔들리게 됩니다.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도 부모가 죽으면 슬프고, 누구와 헤어지면 서운하고..... 역시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다른 점은 한없이 배가 파도에 밀려서 떠내려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일종의 안도감, 마음속의 평화거 있다는 것입니다. 25쪽
내 나이 60을 넘은 요즘 역시 인생에는 끝이 있다. 겨울이 있다 별수없이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으로 받아 드립니다. 26쪽
젊고 건강하며 성공해서 모두로 부터 떠받드려지는 가치를 많이 가지고 있을 때에 종교 본래의 특질이 발휘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좌절하거나 금이 가거나 넘어 졌을 때 인생을 견디어 내게 하는 것 그것이 종교의 세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7쪽
종교란 머리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는 데 있는 것이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아무리 배워도 자기가 주가 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행함"이 필요합니다. "기도"라는 것도 하나의 행위입니다. 28쪽
성서를 읽어도, 그것으로 실제 사는 데 있어서의 전환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으로 머물고 그것이 몸안에 들어 오지 않습니다. 몸 안에 들어오는 데는 물론 불경을 공부하는 것도, 성서를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행위라는 게 없으면 아무래도 관점은 전환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9쪽
물리적 공기의 흐름은 아닐 겁니다. 대자연의 숨결이라고 할 수 있는 천연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바람은 성서에도 나옵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이 "프네우마"라는 그리스어로 나옵니다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오랫동안 이것을 "성령"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리스어의 프네우마라는 말은 바람이라는 의미도, 영이라는 의미도, 숨결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이라는 것은 천연의 바람이라고 이해해도 될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저(根底 사물의 뿌리나 밑바탕이 되는 기초)를 불어가는 바랍입니다. 29~30쪽
하느님은 존재하고 계서도 결코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진보해도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과학적으로 도출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32~33쪽
가을 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므로 가을 자체를 볼 수 없을 겁니다. 부는 바람 소리라든가 단풍 한 잎에서 가을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도 결코 대상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한다든가 만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찾아나설 것이 아니라 등뒤로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36쪽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신이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자연과 떨어진 곳에 계시다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올바르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8쪽
기도라는 것은 원래 마음의 침묵 속에 하느님의 눈길을 귀여겨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는 것이 있어야만 비로서 말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햇살 속에셔"햇볕 쬐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감사, 사죄, 찬미와 같은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따뜻한 눈길을 온몸에 받는 햇볕 쬐기라고 생각됩니다. 51쪽
신심일여(身心一如) 마음과 몸은 하나 55쪽
"주의 기도"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말씀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마테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 두 책에 실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오랜 세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마테오 형의 주의 기도를 채용해 오고 있습니다. 56쪽
마음 만이라도 정성의 도리를 지킨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지켜 주시리라 (일본, 야기의 시) 58쪽
유명한 <산상 설교>라는 긴 예수의 설교가 신약 성서 안의 '마테오 복음서'에 있습니다만 거기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그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8쪽
당시 얘수와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고 예수를 십자가상으로 돌아간 것은 유대교중에서도 '바리사이파'라고 불리는 한 종파로서, 유대교도의 성전인 구약성서에 적혀있는 <모세의 율법>을 가장 열심히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59쪽 모세의 율법은 유대교의 신앙에 의하면 기원전 1200년께 하느님 야훼께서 시나이산의 정상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계명 59쪽
구약의 하느님 야훼는 명령을 듣는 선한 사람에게는 자비와 긍휼(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을,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멸망과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고 질투와 노여움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은 매춘부와 같은 더러운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것, 방탕의 길에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즐겨이 받아 들이고, 아흔아홉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신약성서의 하느님이 별개의 하느님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 하느님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61쪽
저 아침 햇살에 빛나는 백설의 준열한 깨끗함 앞에 섰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더러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62쪽
기도는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여백을 통과해 가는 바람으로서 우리들의 삶, 마음을 빨아 올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66쪽
마르코복음 2:21~22)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는 법입니다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랜 구약의 가르침과 자기의 새로운 가르침을 혼돈하지 말라는 예수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72쪽
"구약성서"중에 "판관기"에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는 시는 이 시대의 생긴 일들을 노래. 76쪽
"출애굽기" 20.3-6 유명한 시나이 산정에서 하느님 야훼의 10계를 수여하는 장면입니다만, 야훼 스스로가 자기를 질투의 하느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77쪽
야훼의 질투는 구약성서중에 "스바니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적에 대한 노여움을 심판과 연결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77쪽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표현을 빌리면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고 우리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는 세계종교라는 점 입니다. 79쪽
바올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속의 말은 아주 중대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서의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지키는 것이 있다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계율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자가 지키는 것은 그것이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그것을 다시 말씀하셨기 때문이거,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행위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사렁의 행위를 어기기 때문입니다. 82쪽
신약성서란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알고 하느님을 알고 참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을 가르치는 실천의 책이고 인생의 지도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85쪽
기도라는 것은 자기의 작고 부족한 것을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마음을 비워서 하느님의 사랑의 숨결을, 하늘의 바람을, 성서의 말로 표현하면 성령을 마음 안으로 불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89쪽
윤리의 기본이 벌에 대한 공포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의 구원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의 벌을, 하는 식으로 정면에서 육박해 오는 것이 유대교의 하느님 야훼로 대표되는 부성원리가 강한 신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일 미사를 고의로 빠지면 대죄로, 그것만으로 지옥에 갈 수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는 상태. 이 죄와 벌의 공포가 가장 심했던 19세기 말
95쪽
루가복음서 7장에 나오는 물장사하는 여성, 간음한 여인이 나오는 요한 복음서 8장, 당신들 가운데서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예수가 간음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매춘부이든 간음을 한 여인이든 그 사람들이 짊어지고 온 인생의 고통과 눈물을 먼저 느끼는 아가페의 마음을 예수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96쪽
배반자 유다라 할지라도 물론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한, 하느님의 손은 그를 거절하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생각합니다. 97쪽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죄의식이 아버지의 법도를 배반한 벌의 공포에서 오는 것인데 비해 아사세 콤플렉스의 죄의식은 용서해 준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8쪽
**데레사와 만남으로 신앙** 91쪽
데레사는 189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곤에서 출생. 유럽의 그리스도교 성인 중에서 자연을 더없이 사랑한 성인이라면 데레사 외에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새나 물고기에게도 설교를 했다는 아씨시의 성인. 99쪽
데레사는 하느님은 내 눈앞에 대자연의 책을 펼치셔서 이 신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만드신 꽃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아름답기 때문에 장미의 빛나는 듯한 아름다움도, 흰 백합의 청초한 깨끗함도, 작은 제비꽃의 향기나 개양귀비의 가련한 귀염성을 헤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만일 작은 꽃이 모두 장미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자연은 봄의 치장을 잃고 야산은 이미 갖가지 색깔의 꽃으로 아름답게 아로새겨질 수 없을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꽃동산인 영혼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100쪽 (산길에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면서 무심하게 피어 있는 이름없는 야생화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인상깊게 심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까이 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 잃는 일입니다. 102쪽
데레사는 아집이라는 쓸데없는 쓰레기를 버리고 비우는 것. 우리들 말로 말하면 "무심"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102쪽
(예수님이 체포에서 재판, 십자가에 매달릴 때 까지) 아무도 도와 드리러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도와 드리러 나섰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09쪽
요한복음서 21장 등은 아주 극적인 장면입니다. 제자들을 선생인 예수가 숯불을 피어놓고 맞습니다. 선생이 자기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맞아 주셨다는 것(요한, 루가, 마태오복음 도), 즉 배반 마져 용서하고 감싸주는 선생의 눈길이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됩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선생의 행동을 몰랐던 것입니다. 114쪽
요한복음서 13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요한은 이것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들이 배반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들을 사랑해 주셨다고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15쪽
루가 복음서 10장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가 있습니다. 117쪽
루가 복음서 18장의 비유는 한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다고 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낭송되지만 루가복음서에 기록된 인구조사도 세금을 걷기 위해 한 겁니다. 119쪽
루가복음서 7장의 죄많은 여자는 예수 발치에 서서 정말 눈물을 흘리며 웁니다. 왜 그녀가 울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를 예수가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126쪽
(여성이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 사회 안에서 아주 낮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예수가 죽었을 때 갈릴래아에서 온 여성들이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랍비로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로서 예수가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은서 4.1~42에 여곱의 우물로 낮에 물을 길으러 온 여자 131쪽
(아이들) 루가 복음서 18장
대체로 크리스찬이란 성실하고 열심한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열심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잘못하면 바리사이파로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살면서 바리사이파처럼 되지 않는, 가볍고 부드러운, 이웃의 슬픔을 가슴에 새기는 그런 아가페의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항상 '예수의 눈길'을 쳐다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33쪽
크리스마스가 말해 주는 것 135쪽
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이 관 속에서 3차원의 세계로 되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들려진 예수가 3차원의 차원을 넘어선 영원한 차원에서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147쪽
10 여년 전에 읽고 재독(再讀)하다 2019.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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