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잡기(雜記)

추(秋)한 나이, 추(醜) 하지 않기 위하여 술을 끊다

Bravery-무용- 2016. 12. 22. 21:00

추(秋)한 나이, 추(醜) 하지 않기 위하여 술을 끊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로마 신화에서는 바카스)는 술만드는 비법을

이카리오스(Ikarios)에게 가르쳐 주었고 이카리오스는 자기가 만든 술 때문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2016년 10월 23일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인왕산 산행을 하였다.

산행을 하면서 막걸리 몇 잔, 소주는 백사실계곡에 내려와서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통인시장에서 다시 어울려서 많은 양은 아니지만 소주를 마셨고, 지하철 타고 역곡에 내려 산내들,명서방과 소주를 또 마셨던 것 까지는 기억이 저장되었고 전철을 타고나서는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지하철 출구를 나왔는데 산내들이 나를 부축하고 아내가 나와있다. 동춘역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국철 1호선에서 다시 인천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타고 동춘역에 왔을까?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산내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아내가 부축을 하고 집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다. 완전히 블랙아웃 상태였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도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단히 뒤틀렸다는 뜻이다.

하루 종일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더듬기 위하여 명서방과 산내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취중에 실수가 없었는지?

답은 보는 건 만으로도 좋았고 실수는 없었단다. 산내들은 아내에게  혼나지나 않았는지 궁금하며 실수는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문자 내용으로는 실수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니....

퇴근하여 집에서 아내가 술을 마시고 끊는 것은 당신이 판단할 일이라면서 나에게 어제의 행동에 대하여 차근차근 이야기하여 주었지만 역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게 혼란 속에 월요일이 지나갔다.


화요일 하루 동안은 월요일과는 달리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을 하였다.

금년에 취기가 오르며 술을 마셨던 기억을 떠올리며 중간중간에 필름이 끊겼던 흔적을 찾아본다.

광역버스를 타고 내릴 곳에 내리질 못하고 종점까지 가지 않나, 상대방과의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일, 5월에 친구들과 울릉도 여행 중 첫 날, 저녁 식사 후에는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 것 등을 더듬다 보니 지나친 과음을 하였던 날은 모든 것이 잠깐씩 블랙아웃 상태로 빠졌었다.


술 마시고 블랙아웃이 되면 알콜성 치매에 걸릴 확률이 크다는 방송 내용이 불현듯 스친다.  마침 그 내용을 정리하여 카페에 올렸기에 다시 찾아 읽어 본다.

<사람의 기억은 했던 일을 아는 "사건기억"과 운전처럼 습관적으로 몸에 익은 "절차기억"으로 나뉘고, 술을 많이 마시면 "사건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의 기능이 떨어져 했던 말이나 행동이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화를 걸거나 택시를 타는 복잡한 일은 할 수는 있지만,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라 합니다. 술 마시고 나서 기억을 못 하는 일이 잦아지는 블랙아웃 현상이 심해지면 알콜성 치매로 진행할 위험성이 매우 높아진다고 합니다. (2016.5.10)>


그래 지금 나의 모습이 알코올 치매로 가는 길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다. 평상시에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새벽 청량산을 오르고, 음식도 선택적 채식주의자들의 식단과 비슷하고, 술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아주 특별함이 없으면 전혀 마시지 않고, 토.일요일에나 술을 마시니 이런 정도의 음주는  건강에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술 마시고 블랙아웃 상태가 된다는 것은 잘못하면 건강에 치명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알코올성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술을 끊자고 다짐을 하였다.  


내 나이 66살, 나름대로 나이를 사계절에 비유하면 가을에 해당되고 다시 24절기로 구분하면 입추는 지났고 처서(處暑)쯤은 될 것이다. 

가을이란 새로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변화를 겪는 사추기 (思秋期)로 쓸쓸함을 느끼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물든 단풍으로 만산홍엽의 화려함과 함께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기에 온화(穩和)하며, 엄숙함이 더 해 중후(重厚)하게 느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나 역시 풍기는 용모가 가을 같은 분위기로 나이가 들어가 온화하고 중후한 모습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니는 것은 우리 나이의 모든 사람들의 바람일 것이다.

가을처럼 추(秋)하게 나이가 들어야지 지저분하고 더럽게 즉, 추(醜)하게 나이가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됐다.  


그리고 그날 화요일 퇴근 후, 집에서 아내에게 선언했다. 

26년 전인 1990년, 결혼 12 주년 기념일(11월 12일)에 당신에게 결혼 기념 선물로 담배를 끊었듯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절주도 금주도 아닌 단주(斷酒)다.


그런데 단주하여야겠다고 결정하기 직전까지도 술을 줄여야 하나 술을 끊어야 하나 방법에 대해 머리가어지러울 정도로 진종일 고민을 했다.

즉, 절주와 금주 그리고 단주 사이를... 

그만큼 마음 한 구석에는 술에 대한 애착으로 미련을 못 버렸던 것이다.


우선 절주(節酒)는 마시는 술의 양을 줄이는 것인데 지금까지 나의 습관으로 보면 언제나 과음한 다음날은 어김없이 절주를 다짐했지만 실천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술을 마시던 버릇이 있어 어울려 한 잔을 마시면 두 잔, 세잔 그리고 한 병, 두 병... 쉽게 제어가 안되었다.


<花看半開 酒飮微醉 此中大有佳趣(화간반개 주음미취 차중대유가취),꽃은 반만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조금만 취하도록 마시면 그 가운데 무한히 아름다운 멋이 있다.
若至爛漫 酕 醄  便成惡境矣 履盈滿者 宜思之(약지난만모도 변성악경의 이영만자 의사지) 만약 꽃이 활짝
피고 술이 흠뻑 취하는 데까지 이르면 추악한 경지가 되니, 가득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생각해야 한다.> 채근담에 나오는 글이다.

얼마나 멋있고 좋은 글인가? 그런데 나는 블랙아웃 상태까지 가니 그런 멋을 지니 질 못하였다.

한잔만, 세잔만, 반 병만 하겠다고 하다 술에 흠뻑 취하여 정신이 혼미하여야지만 술자리에서 일어났었으니 얼마나 추악했었을까? 

온전한 정신으로 느끼니 부끄러움으로 소름이 돋는다.

모든 일, 특히 음주에 대해서 만큼은  적가이지適可而止, 즉 적당할 때에 그쳐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주로는 고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금주(禁酒)를 생각해 본다.

사전적으로는 1.술을 못 마시게 금함(liquor prohibition) 2. 술을 끊음(temperance)으로 뜻이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로 보면  prohibition 즉, 국가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조를 비롯하여 많은 왕들이 금주령을 내렸었고,  미국에서는 1920년에 전국에 금주법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을 하지 못하였다.

가정으로 생각하여도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가족들이 약간은 강제적으로 시일을 정해놓고 술을 끊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족들의 동정심과 본인의 의지에 한계가 있어 실패할 확률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더욱 단호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주(斷酒)이다.(Quitting drinkkng)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소극적으로 단순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보다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그리고 정직하게 바라보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모금도 하면 안 된다. 


이제 나의 결심은 섰다.

단주다. 단주를 실천하기 위하여 술자리에서는 누구에게든 내가 왜 술을 끊어야 하는 사유를 당당히 설명하고 단주를 선언하기로 다짐하고 행동에 들어서기로 했다. 


첫 번째 행동은 10월 29일 친구 모임이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단주를 선언하였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필름이 끊겼던 이야기 등을 설명하니 모두가 기꺼이 수긍을 하여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하였어도  친구들이 그까지 것 가지고 술을 끊느냐는 등 갖가지 핀잔을 하였을 텐데 모두가 동의를 하여주었다. 

그리고 그날 단주를 실천하였다.

두 번째는 10월 30일 태화산우회와 함께하는 해명산 번개산행. 단주를 선언하니 난리들이다. 몇 번을 산우들이 권하기도 하였지만 단호리 뿌리쳤다. 두 번째 단주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1월 6일 장수 장안산 산행. 역시 성공하였다.

12월3 일 동창회 송년 모임에서도 동창들에게도 단주를 선언하고 성공하였다.


이번 결심을 하기 전에는 과음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 지금부터 술을 끊는 거야 생각을 하였지만 저녁때만 되면 또 술 생각이 났었다.

근데 참 이상하다. 이번에는 단주를 선언하고부터는 술이 앞에 있어도, 누가 권해도 내 자신이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제 10월 23일 단주를 선언하고 2개월이 지난 오늘 12월 23일까지 술자리가 20여 회 이상 있었지만 단주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곁눈으로 의심에 차있었던 아내도, 딸도 이제는 믿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기뻐하고 더욱 격려를 하여준다.

가족, 친구, 산우님들 등 주위의 도움이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며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남기는 것은 단주를 하겠다는 사실을 공개하므로써 실천하는데 더욱 의지력을 갖기 위해서 이다. 


마침 12월21일자 동아일보 {이정원의 옛글에 비추다}에 <술로 망하는 사람>에 실려있는 글이다. 

 맨 정신에 취한 사람을 보면 
이전에 나의 취한 모습을 
남들이 비웃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醒而見醉者知有人笑我之醉者 (성이견취자 지유인소아지취자) 

―남공철(1760~1840), ‘금릉집(金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