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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박완서 묵상집)

Bravery-무용- 2015. 5. 28. 14:52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박완서

 

1996년부터 98년 말까지 천주교<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지독한 추위였습니다. 날을 세운 얼음이 살갗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독하고 매서운 추위였습니다. 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안에서 폭발하는 기쁨 때문에 추위조차 쾌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마중하러 갔다는 게 그렇게 기뻤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하는 산상교훈. 인간에게 말이 잇어 온 후, 말하여진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 하더군요. 진실로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유인이라면 하늘나라의 상을 받을 만하군요.

 

그리스도교가 사라의 종교라는 것과,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사니까요.

 

원수야 말로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가장 무서운 건 원수지간이 아니라 사랑도 미움도 없는 무관심입니다.

 

놀랍고 황홀한 순간 요한 4.5-42

당신은 유대인이거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는 여자의 대답에서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있던 당시의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상종하기 싫은 천민이었나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유구하고도 철옹석처럼 단단한 인종적 편견, 성차별의 관행을 부드럽고도 유연하게 뛰어넘어 하나의 자유인으로 그 여자 앞에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도 편애를 하시나요

닫힌 박애가 존경스럽기보다는 측은 합니다. 가족도 주마고우도 사랑할 줄 모르는 박애는 자기도취나 명예욕이지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설하셨으니까

 

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즈맨

유다라면 천하에 몹쓸 배반자라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긴 게 인간의 한계인 당신의 육신일 뿐 당신의 정신이아 신성은 아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은행나무보다 큰 봄까치꽃

봄의 잡앞 풍경

 

에미 마음, 여자마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것도 여인들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뵌 것도 여인이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만남들

주님 저의 임종의 자리에도 임하시어 저로 하여금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안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미소짓게 하소서, 제 생전에 허물이 막중하여, 비록 천국을 약속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축복 받은 첫 영성체

심여 년 전 에비자 교리를 받을 때였으니까아직 성체를 영한 경험이 없을 때였다. 그때 태생 교우라는 나이 지긋하고 신앙심 두터운 자매님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영세 받은지 얼마 안되는 교우가 성체로 영한 밀떡이 과연 주님의 몸일까 의심스러워 입에 넣지 않고 슬쩍 주머니에  숨겨가지고 나와서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분질러 보았더니 피가 나오더라는 얘기였다. 초보자가 영성체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이해가 가나 그런 유의 얘기는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딘지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하고 공포스러운 것하고는 다르다. 거룩한 것은 정신을 고양시키지만 공포는 정신을 억압해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워즈워드의 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마음 뛰노나니/내가 어렸을 때 그러하였고/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만일 늙어서 그렇지 아니할진대/차라리 나를 죽게 하소서/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원컨대 나의 하루하루를/타고난 경건으로 이어가게 하소서

자연과의 깊은 교감으로 동양에서도 널리 사랑 받고 있는 이 영국의 계관 시인은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까닭을 자연에 대한 천성의 때묻지 않은 경건함에서 찾고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다른 사람 불행 불쌍히 여기 마음 이른다.

최후의 만찬이 가장 슬프고 숙연한 식사라면, 가장 장엄한 대만찬은 빵 다석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기적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나마 유지한 재 거의 피안을 바라보게 되었음은 아슬아슬한 고비마다 손을 내밀어 준 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나의 가장 값진 신앙체험이다.

 

주님의 잣대

자연이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바람을 내리듯, 그것이 곧 사랑이고 사랑은 공평 이상의 가치인 것이다.

 

빈무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제일 먼저 무덤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곧장 예수님의 부활을 본 건 아닙니다. 여인들이 부활보다 먼저 확인한 건 빈 무덤이었습니다.

 

에수님이라면 어떨게 하셨을까?

설사 그 떡이 귀신한테 빈 떡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모든 가치 기준의 최고로 삼기만 했다면 그 떡을 다만 귀한 음식으로 받아들릴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신의 겸손

에수님께서는 도처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두둔하십니다. 사람을 미워하신 일이 없는 에수님도 교만만은 미워하고 경계하셨습니다.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밤나무는 봄에 모든 꽃들이 다 필 때 겨우 잎이 돋더니 꽃들이 다 지고 천지가 적막할 때 향기 짙은 꽃을 피워 골짜기 가득 벌들을 불러모읍니다. 여름날 숲에 고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숲은 더욱 싱싱하게 빛나며 환희의 춤을 춤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