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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너머 그대에게(이주향)

Bravery-무용- 2015. 4. 29. 16:35

철학자로써 그림속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철학,신학,예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화가들의 작품 속을 거닐면서

우리 삶의 신비로움, 세상을 변화사키는 사랑의 힘을 성찰한다.

저자의 풍부한 소양에 감동하며 읽기 편하다.

그림의 문외한 나를 일깨워준 책.

 

책소개

그림으로 전하는 성찰과 위로의 시간!

세상 속 당신을 위한 이주향의 마음 갤러리그림 너머 그대에게. 이 책은 20111월부터 12월까지 한 일간신문에 저자가 이주향의 철학으로 그림 읽기로 매주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서양 미술을 매개로 신화와 종교, 철학 이야기를 오롯이 들려주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 마르크 샤갈의 거울’, 앙리 마티스의 원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앙리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자’, 마르크 샤갈의 떨기나무 앞의 모세’,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등의 그림 속에 담긴 집단 무의식을 통찰하고, 신화 속에 갇힌 생의 지혜를 풀어내고, 종교 속에 숨겨진 세상의 비밀을 들춰 보인다. 그림 속에 담긴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보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이주향

현 수원대학교 인문대 교양교직과 교수로 심성내용의 비개성주의적 개별화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나는 만화에서 철학을 본다',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나는 길들여 지지 않는다' 등 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다나에>

제우스와 사랑에 빠진 여인답습니다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왕은 신탁을 받고 딸을 가둔다.

벽속에 갇혀 있는 다나에를 만나기 위해 황금 빗물로 스며든 제우스의 사랑에 감동합니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사랑 속에서 혼연일체가 된 관능적 여인의 모습입니다.

클림트는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던 여인을 해방할 힘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 같지요?

 

디에고 벨라스케스<거울을 보는 비너스>

사랑의 신 에로스가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만 봐도 거울을 보고 있는 여인은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입니다. 비너스는 언제나 거을을 봅니다. 그녀의 본능입니다.

그림을 의뢰한 이는 당시 스페인 총리대신의 아들로 천하의 바람둥이 였던 가스파르 데 아르였다고 합니다.

거울 속의 비너스를 바라보십시오. 비너스는 자신을 보고 있는게 아니라 그녀를 보는 당신을 응시하고 있지요? 당당하고 도도한 것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게 비너스입니다.

비너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찬사를 받는 일입니다. 찬사를 보내지 않는 자를 그저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모독한 죄로 질투하고 보복합니다.

모든 여성은 비너스적 기질이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세비아의 물장수>

물장수는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소화해낼 줄 아는 현자 같습니다. 기분 좋게 나이 든 온화한 물장수가 주는 물 한잔 받아 마시면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을 돌며 생기를 실어 나를 것 같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출세한 화가 입니다. 궁정화가였으니까요.

 

마르크 샤갈<거울>

비너스의 거울은 자아도취, 해리 포터의 거울은 소망의 거울이고 샤갈의 저 거울은 행복의 거울 같습니다.

왼쪽 아래의 작은 여자, 보이세요? 편안하게 잠들어 노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그 여자가 보라빛 톤의 신비한 거울을 평화롭고 따뜻하게 느끼도록 해줍니다. 평온히 잠들어 있는 저 여자가 자꾸 나를 붙드는 겁니다.

꿈에 집착하는 사람은 현실이 불행한 사람이고,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행복

                   헤르만 헤세

행복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닌다면,

당신은 아직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당신 것이 된다 해도.

잃어버린 것을 당신이 안타까워하고

목표를 정해놓고 초조해 한다면,

당신은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갈망을 단념하고

목표나 욕망 따위를 더 이상 알지 못할 때,

행복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비로소 일상의 물결은 더 이상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찾을 것입니다

 

에드웨드 번 존스<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는 자의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초라한 거지 소녀를 사랑해서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왕관을 내려놓고 있는 왕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왕은 사랑하기를 원합니다.왕이 사랑하는 저 여인을 보십시오. 손에 아름다운 꽃을 들고 있는 소녀는 지금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왕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그녀는 왕을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삼손과 델릴라>

삼손, 사내다운 사내였지요, 삼손은 싸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루벤스의 <산손과 델릴라>의 상황은 사랑의 함정에 빠져버린 삼손입니다.

요염한 여인은 팜므파탈의 계보에 있는 델릴라입니다.

삼손은 이방(異邦)의 여자 델릴라를 사랑했고 델릴라때문에 힘이 빠졌습니다.

삼손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머리카락이지요?

아킬레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모세도 모두 약점이 있습니다.

그림속의 델릴라 침실은  한 남자는 손에 가위들고, 노파는 그 남자를 위해 빛을 밝혀주고, 문밖에는 삼손을 잡으려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팔아먹는 델릴라의 아름다운 육체를 보고 있노라면 슬퍼지지 안습니까

***델릴라;팔레스타인 돈의 유혹에 사랑을 팔았다.

 

***팜므파탈;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 팜므는 프랑스어(語)로 '여성', 파탈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을 뜻한다.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미술·연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말로까지 확대·변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굴레 즉, 팜므 파탈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타고난 여성이다. 따라서 팜므 파탈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 역시 팜므 파탈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팜므 파탈의 예로는, 뱀의 꾐에 빠져 금단(禁斷)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하와(이브), 헤로데스를 춤으로 유혹해 그로 하여금 세례 요한을 죽게 하는 《신약성서》의 살로메 등을 들 수 있다.

 

안토니오 카노바<에로스와 프시케>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을 추고 있는 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입니다. 아무에게나 장난처럼 사랑의 화살을 날려 책임질 수 없는 사랑에도 빠지게 만드는 악동이지요. 사랑이 장난인 그는 스스로 사랑에 빠지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가 사랑에 빠져 있네요.

에로스와 짝이 되어 사랑의 춤을 추는 저 여인은 누구지요? 그녀가 바로 인간의 딸 프시케입니다.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사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프시케는 사랑의 신 에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에로스는 두 가지 조건을 달고 밤마다 프시케를 찾아옵니다. 나를 보려 하지 말라! 새벽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마라!

사랑이 위험한 것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계명이 저절로 지켜지는 거지요.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겁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프시케>

우선 무장 해제하고 편안히 잠들어 있는 남자와 그 남자 곁에서 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요? 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고, 여자는 그의 여인 프시케인데, 별 장식이 없어도 아늑하기만 한 침실이 그들의 따뜻했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인의 표정입니다. 등불을 들고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프시케의 얼굴이 어쩐지 산뜻하지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금기를 깬 여인의 표정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사랑의 금기를 깨고 난감해하는!

의혹으로 프시케는 등불을 들고 정면으로 에로스를 봅니다. 추하고 잔인하고 믿을 수 없는 괴물인 줄 알았던 자기 사랑이 천진하고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신이었습니다. 사랑은 신이었습니다.

눈부신 사랑을 확인한 프시케는 오히려 난감합니다. 그제야 자신이 금기를 깼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요. 그 순간, 금기를 깼으니 사랑도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았겠습니까? 루벤스의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그 후 에로스는 그녀를 떠나잖아요.

 

 

장 레옹 제롬<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피그말리온과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는 저 아름다운 몸매의 여인을, 그녀는 갈라테이아입니다. 세상에는 간직해둘 만한 가치있는 여자가 없다고 세상의 여자를 사랑하지 못한 피그말리온이 직접 조갓하여 만든 그 여자 갈라테이아! 여자의 발이 조각대에 붙어 있습니다. 그녀는 현실 속의 여인이 아니라 만들어진 여인, 환상속의 여인 입니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의 화살이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저 순간은 그의 간곡한 소망이 실현되는 극적인 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생겨 났습니다.

 

주)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란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교사가 기대하지 않는 학습자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골렘 효과라고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진정으로 원하면 이루어 진다."는 의미이다. 피그말리온이 여인상을 조각했는데 자신이 만든 여인에 반해서 그 조각상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신이 그의 정성에 감동에 그 여인상을 살아있는 여인으로 만들어 주엇다는 이야기이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하면 진심으로 노력하세요.그러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주;중세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다. 키프로스의 왕이자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만들어 ‘갈라테아’란 이름을 붙이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다가 사랑에 빠진다.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의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들여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퍼온 글)

 

에두아르 마네<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발표되었을 당시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작품입니다.

신사들 사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인!

여인의 표정은 단정하지도 않지만 도발적이지도 않습니다.

저 그림을 보면 소풍을 가고 싶습니다. 목욕이 무례가 되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간가에서 멱을 감으면서 자연스럽게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겉치례 없이도 불편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앙리 마티스<원무>

 

무엇을 할 때 자유를 느끼십니까?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뻥 뚫리고 호흡이 편안하신가요? 마티스의 ‘원무’는 춤을 출 때 자유로운 여인들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참 단순합니다. 하늘과 땅과 춤추는 5명의 여인들! 색도 단순합니다. 푸른 하늘, 녹색의 대지, 신명 속에 있는 땅 색의 여인들!

마티스의 시간은 언제 무르익었을까요? 자신을 알아주던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마티스는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세잔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때 마티스는 비로소 스승 모로가 던져놓은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환호합니다. ‘아, 그래. 군더더기는 필요 없어! 색이 넘칠 필요가 없어. 덕지덕지 장식을 입히지 말고, 직관이 명하는 대로 단순하게 그리면 되는 거야. 본질적인 것만!’ 세잔의 그림 곁에서 길을 찾은 거였습니다. 그가 평생 세잔의 그림 ‘목욕하는 세 여인’을 끼고 살았다는 건 유명합니다.
5명의 여인이 춤을 춥니다. 표정을 알 수 있는 것은 한 여인뿐이나 한 여인은 모든 여인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모두 일체감 속에서 무아지경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춤뿐입니다. 텅 빈 충만의 춤! 세상은 춤을 출 수 있도록 텅 비어 있지만, 춤을 출 수 있도록 움직임으로 꽉 차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춤을 춥니다. 하늘이, 대지가, 햇살이, 바람이,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들이!

 

조르수 로슈그로스<꽃밭의 기사>

신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쉽게 친숙해질 그림입니다. 저 그림은 남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 파르시팔 신화를 그린 것입니다.
파르시팔의 영감의 원천은 블랑쉬 플레르(Blanche Fleur)라는 여인입니다. 하얀 꽃이라는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그녀가 파르시팔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지요? 그 하얀 꽃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게 위협을 받자 하얀 꽃은 파르시팔에게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물론 파르시팔은 목숨을 걸고 침입자를 몰아냅니다. 남성을 싸울 줄 아는 사내로 만드는 것은 여성적인 힘이니까요.

파르시팔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지요? 아무래도 표정이나 행동이 이상합니다. 상황은 그야말로 꽃밭인데, 파르시팔은 무표정하지요? 유혹에 무감각해서 무표정한 게 아니라 유혹을 견디는 훈련을 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유혹이 목적이라는 듯 남자를 홀리려는 여인들이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저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겠습니다. 사랑하되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저기 저 몽환적 자태의 무수한 요정들은 남자가 빠져들기 쉬운 무드의 상징이겠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실수하고 실패하는 곳이 바로 무드입니다.

원래 저런 꽃밭은 무드에 사로잡힌 원기 왕성한 남자들이 원하는 행복의 모습입니다. 로버트 존슨은 경고합니다. 야릇하게 들뜨게 만드는 저런 유혹은 마침내 우울증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고. 그나저나 저런 무드에 빠지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진부하지만 그것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서로의 소망을 아끼고 서로의 미래가 되어준다는 것이겠지요. 무드는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함께 꿀 수 있는 꿈이 자라지를 못합니다. 반면 사랑은 따뜻하고 시원한 것, 온유한 것이어서 함께 꿈꿀 수가 있습니다.

**파르시팔;중세 아서 전설에서 성배 찾으러 나선 기사

 

 

조지 클라우센<들판의 작은 꽃>

작디작은 꽃이 정말 아름답지요? 저 노란 꽃이 아름다운 건 아무래도 소녀의 시선 때문일 겁니다. 꽃에 홀린 소녀의 표정이 아니라면 저 작디작은 꽃이 저렇게 선명하게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꽃을 보는 소녀야말로 노란 꿈을 꾸고 있는 꽃입니다. 저 소녀가 말해주는 것 같지요?

소녀가 꽃에 매혹되어 잊을 수 없는 눈짓을 보내는 순간, 꽃도 소녀에게 매혹되어 모두가 별처럼 빛나는 겁니다. 꽃은 대지가 피워낸 별이고, 꽃에 빠져 있는 소녀는 대지의 별을 보호하려는 것 같습니다.

봄입니다, 자연이 생명 있는 것을 도발하는 봄, 봄! 아기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연둣빛 잎사귀에 싸여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노란 꽃, 분홍 꽃, 흰 꽃, 보라 꽃들이 별처럼 피어납니다. 니체가 말했습니다. 봄날의 대지엔 젖과 꿀이 흐르는 것 같다고. 대지의 젖과 꿀이 꽃잎을 물들이고 마침내 소녀의 눈 속에 스민 그림이 저 그림입니다.

봄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도발하는 봄입니다. 담담하게 살려 해도 피부가 햇살에 반응하고, 눈이 나비처럼 피고지고 피는 꽃들을 따라다닙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봄날, 우울하게 방 안에 갇혀 있는 건 봄날의 자연을 모독하는 거라는 생각이 절로 찾아듭니다. 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문득문득 피어나고 문득문득 사라져 망연해질 틈도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들판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선한 사마리아인>

저 따뜻한 노랑과 안정감이 있는 파랑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괜찮다, 괜찮다, 위로해주는 어머니의 품 같습니다. 아마도 저 그림을 그릴 때 고흐는 따뜻한 사랑이 절절히 그리웠나 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한 남자가 강도를 만나 빈털터리가 된 채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율법사가 그냥 지나가고, 경건한 레위인이 그냥 지나칩니다. 그를 보고 도와준 것은 천하디 천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환자를 말에 태우는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상처 입은 남자의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사마리아인의 자세가 힘에 부쳐 보입니다. 그러나 힘이 생겨나는 것도 같지요? 남자를 받아들이는 말의 태도도 안정적인 것이 저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랑에는 진정한 힘이 있다. 사랑으로 한 일은 무엇이든 잘 한 일이다.”

고흐는 저 한 장의 그림에 많은 걸 담았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가보면 뒷모습만 보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한 사람,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또 한 사람! 그들은 상처 입은 남자를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버린 율법사와 레위인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해왔던 지도층 인사들인 거지요.

에드바르 뭉크<절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귀를 막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자가 끔찍했습니다. ‘어휴, 저런 그림은 공짜로 줘도 내 공간엔 걸어놓을 수 없겠구나. 차라리 울지, 서럽게 울어버리지, 그랬더라면 희망의 불씨라도 보았을 텐데…. 뭉크는 왜 저런 그림을 그린 거야?’ 나는 울지도 못하는 남자가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저 남자는. 저 해골바가지 같은 남자로 인해 실상은 매혹적으로 빛났을 오렌지 빛 하늘은 불안하기만 한 핏빛으로 흐르고, 분명히 아름다웠을 석양의 바다는 검푸른 괴물이 되어 남자를 덮칠 것만 같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겠지만, 세상에 대한 해석은 ‘나’의 그림자니까요. 뭉크는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산책을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친구들은 산책을 계속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절규를 들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자연의 절규를 혼자서만 들은 것입니다, 뭉크는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았나 봅니다. 그런 것들이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도 그럴 것이 뭉크는 다섯 살 때 세상의 중심인 엄마를 잃고, 열네 살 때는 엄마 대신 정을 붙이고 살았던 한 살 연상의 누이를 잃어버립니다. 젊은 엄마도,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도, 모두 결핵이었습니다.
어리고 여린 어린이가,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앗아가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소화되지 않은 운명은 공포가 되어 온 세포를 물들이고, 온 세상을 물들입니다. 그러니 ‘나’는 절규하고, 세상은 절규가 됩니다. 뭉크의 그림이 무섭고 어둡고 불안한 운명을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슬픔>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있는 저 여자, 울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지지해주는 이 없이 살아낸 그악한 세월이 버거워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하는 저 여자는 반 고흐가 사랑한 여지 시엔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자의 배가 불렀습니다.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고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격노한 메데이아>

 

복수하는 마녀의 신화적 원형, 메데이아를 아십니까? 내 남자의 여자를 죽이고, 마침내 자신의 두 아들까지 직접 살해하는 그 여자 메데이아! 어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저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입니다.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 메데이아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황금양털을 훔쳐 이아손에게 주고, 이아손과 도망친 것입니다. 뒤쫓아 오는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사랑은 금이야, 옥이야 사랑해준 부모를 하루아침에 배반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한 모양이지요? 왕이 되지 못한 영웅에게 왕이 될 기회는 언제나 유혹적인가 보지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이 영웅 이아손에게 자신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 제안에 혹한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세상에, 영웅은 그런가요?메데이아는 남편의 여자를 죽입니다. 물론 그것은 복수입니다. 복수하기 위해선 자기 인생도 풍비박산 나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녀는 복수하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왼손에 비수를 들었어도 무릎동작이나 오른손의 동작을 보면 오히려 아이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을 보십시오. 분노의 표정이 아닙니다. 뒤돌아보고 있는 그녀는 지금 뭔가에 쫓기고 있지요

 

존 월리엄 워터하우스<아러아드네>

 

저기 저, 잠든 여인 뒤로 멀리 배 한 척이 떠나는 게 보이지요? 저렇게 고요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평화로운 순간에도 배가 떠나듯 사랑이 가고 행운이 갑니다. 그러나 또 발치에 앉아 여인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는 두 마리의 표범들처럼 사랑이 오고 행운이 걸어들어 올 것입니다. 강제할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는 디오니소스의 표범이 스스로 찾아온 것을 보면 저 여인이 운명적 인물인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잠들어 있는 젊은 여인은 아리아드네고, 떠나가는 배는 그녀가 사랑한 영웅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가 잠든 틈을 타 도망가는 거고,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여인이라 하기엔 자태부터도 너무나 매혹적이지요?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옷은 그녀의 열정을 증거합니다. 붉은 옷 밑으로 살짝 드러나 보이는 깔개는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신비한 색이면서 권력의 색이지요? 붉은 열정과 보라의 힘은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당황하는 자의 색도 아니고, 종속적 사랑으로 사랑을 구걸하는 자의 색도 아닙니다. 저 색은 당당하게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색입니다.

 

티치아노<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그토록 매혹당한 여인이 저 여인 유디트고, 그녀의 손이 들고 있는 얼굴이 조금 전까지 그녀를 찬탄했던 바로 그 남자 홀로페르네스입니다. 오스스, 소름이 돋지요? 사랑을 나눈 남자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침착한 여인의 모습 때문에 돋는 소름의 정체는 두려움일까요, 혐오감일까요, 아니면 공감일까요?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파탈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브, 데릴라, 메데이아, 살로메 같은 여인들이지요. 유디트는 그 팜므파탈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입니다.

유디트는 유다여자란 뜻입니다. 유다의 도시 배툴리아가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도시의 원로들은 모두 앗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에게 성읍을 넘겨주려 합니다. 그때 그건 옳지 않다고, 안된다고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과부 유디트입니다. 유디트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디트는 과부의 옷을 벗고 성장을 합니다.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가서 유혹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아름다움을 팔아서 나라를 구한 팜므파탈이라 하는 것입니다.

 

귀스타브 모로<오르페우스>

유디트의 손에 들려있었던 남자의 목은 참담하기만 했는데, 이름 모를 저 여인이 안고 있는 남자의 목은 침묵 속에서 고요하지요?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거 같습니다. 몸의 일부처럼 늘 지니고 다니며 연주했던 리라 속에 안치되어 있는 저 남자, 그 유명한 오르페우스입니다.

그림은 강물 위를 떠다니는 오르페우스를 건져 올려 신주단지처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입니다. 한 여인이 안고 있는 리라 속 오르페우스를 보면 오르페우스는 죽임을 당하면서도 죽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 오르페우스의 매력입니다.

저 그림은 강물 위를 떠다니는 오르페우스를 건져 올려 신주단지처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입니다. 한 여인이 안고 있는 리라 속 오르페우스를 보면 오르페우스는 죽임을 당하면서도 죽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 오르페우스의 매력입니다.

여인의 발치에 거북이 두 마리, 보이시나요? 갑자기 웬 거북일까요? 아십니까? 오르페우스가 평생 지니고 다닌 리라의 울림통이 바로 거북의 등판이었다는 사실을. 오르페우스, 그 천년의 소리의 비밀입니다.

 

귀스타브 모로<환영>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사는 거친 남자, 그가 저 환상 속의 그대, 세례요한입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가지고 싶은 것도 없는 그는 거칠 것 없는 야성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를 죽인 헤롯왕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권력자였다면, 그에게 죽은 요한은 광야의 바람을 호흡하는 당당한 사내였습니다.

그런 사내를 죽게 한 여인이 저기 저 춤추는 팜므파탈, 살로메입니다.
모로의 그림에서 헤롯은 존재감이 없습니다. 헤롯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나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살로메 등 뒤에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존재감 없는 왕, 그가 헤롯입니다.

 

 

안 반 에이크 <수태고지>


많은 수태고지가 있으나 에이크의 수태고지가 빛나는 것은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그들 관계의 온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이 입고 있는 저 화려하고 화사한 옷, 한 번 만져보고 싶지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날개까지 저 섬세한 옷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 영광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저 옷은 결핍도, 자만도 없이 충만한 존재의 외화(外華)입니다. 우리 속의 수호천사가 바로 저런 모습 아닐까요?

이제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닥의 타일이나 벽면에, 삼손에서 모세 그리고 다윗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유명한 영웅들과 사건들이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두가 아이를 가진 마리아의 신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돌연변이로 태어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오래된 전통이 품어 키운 전통의 꽃이라는 거겠지요.

폴 고갱<신의 아이>

19세기 말 고갱은 화려한 파리의 불빛을 등지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걸어 들어갑니다. 아마도 고갱은 세계 최고의 문명이 갑갑하고 답답했나 봅니다. 여기가 내 땅이 아니란 느낌, 원시의 자연을 찾고픈 느낌을 따라 그는 홀연히 떠납니다.

거기서 고갱은 원주민 소녀를 만났습니다. 고갱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성숙한 소녀 파우라, 그녀가 고갱의 마리아입니다. 저 독특한 그림 ‘신의 아이’는 검은 피부가 아름다운 파우라가 임신을 했을 때 그린 그림이라지요.
흰 옷을 입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산파겠지요? 제목이 ‘테 타마리 노 아투아(TE TAMARI NO ATUA·신의 아이)’인 걸로 봐서 아이를 낳고 누워있는 저 여인이 동방의 현자들이 경배하고 모든 어머니들이 손을 모으는 성모인가 봅니다.

서양 예술에서 성모는 거룩하고 온화한 이미지지요? 저 그림이 독특한 것은 성모가 성스럽지도, 온화한 성품을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를 낳느라 탈진한 듯 고단하게 누워 있습니다. 하늘에서 영광이 내려 온 것인데, 영광의 중심에 있는 성모는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저 그림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래, 성모는 하얀 피부의 백인처녀일 필요가 없어. 그래, 성모는 언제나 인내하는 자세로만, 고요한 자세로만, 기도하는 자세로만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니야. 성모는 힘겨울 때는 힘겨운 채로 자연스러운 어머니야. 그런 의미에서 저 그림은 혁명적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침대 아래 소와 나귀가 저 여인이 아이를 낳은 곳이 마구간임을 알려주네요. 영광의 마구간답게 날개 달린 타히티인 형상의 천사까지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외형상은 누추한 마구간이지만 신의 아이가 태어난 빛나는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 고갱은 침대에 화사한 노란색을 쓴 거 같지요. 그리고 발치의 흰 고양이까지.

 

사실 타히티에서 고갱은 충분히 불행했습니다.

 

램브란트<십자가에서 내려짐>

렘브란트는 이미 죽은 예수의 시신을 밝고 고요하게 처리했습니다. 시신이라기보다는 온 힘을 다해 지킬 가치가 있는 빛나는 보석 같지 않나요? 피안에 든 듯 고요한 예수를 연인을 보듬듯, 보물을 다루듯 내려앉는 저 남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형을 반대했던 의원이었고,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을 예수에게 내주었던 부자였습니다.

요셉 아래서 예수를 떠받칠 준비를 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인이 보이지요. 그가 니고데모입니다. 그 역시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뀐 남자였지요. 사다리 오른쪽에서 예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맑은 남자, 그 남자가 늘상 ‘예수가 사랑한 제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요한입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여인이 있지요. 실성한 듯 비탄에 잠긴 여인, 마리아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봐야 했던 여인,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순간을 살고 있는 그 여인이 맥을 놓지 않고 어찌 저 순간을 견디겠습니까.
평소 여인들을 배제하지 않으셨던 예수의 마지막답게 여인들이 보입니다. 끝까지 예수와 함께 했던 여인 중엔 얼굴을 감싸고 우는 여인도 있고, 슬픔의 힘을 옮겨 자리를 정리하는 여인도 있습니다.
그 여인들이 준비하는 예수 누울 자리가 보이지요. 고요한 예수와 어울리지 않습니까. 죽은 예수는 표정이 없다기보다 평온하고, 예수 누울 자리는 아늑해 보입니다. 우리나라 대형교회 예배당에서 성대하게 준비된 고난주간의 화려한 예배가 정말 최소한의 것으로 간솔하게 예수를 모신 저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결을 어찌 따라가겠습니까.

 

마르크 샤갈 <떨기나무 앞의 모세>

 램브란트<십계를 든 모세>

 

 

렘브란트의 밧세바는 고뇌하는 여인인데, 샤갈의 밧세바는 행복하게 다윗과 융화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샤갈은 부끄럼 없는 순결한 사랑의 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또 렘브란트의 모세는 심각한데, 샤갈의 모세는 온화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성서의 이야기가 나이 들면서 열매 맺은 방식은 그만큼 달랐던 거겠지요. 어린 시절부터 성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었다는 샤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와 같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저 샤갈의 모세를 보십시오. 여성성이 잘 발달된 부드러운 남자 아닙니까? 당신의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한 민족의 지도자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까지 성급했고, 상처 입었고, 무력했고, 고독했던 인간입니다.

저 그림은 떨기나무 앞의 모세를 그린 그림입니다. 신을 벗은 모세, 보이시지요? 샤갈은 신성에 반응하는, 신을 벗은 모세를 흰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심장에 오른손을 얹고 경이롭게 떨기나무를 바라보는 모세야말로 새로운 운명을 향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 같습니다. 샤갈은 그림의 배경으로 생명의 녹색과 신비한 파랑을 써서 모세가 만난 신성한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그나저나 떨기나무를 보십시오. 불꽃은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줘서 눈에 들어오는데, 나무가 볼품없지요?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자라는 떨기나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시나무입니다. 덤불로 엉켜 사는, 메마르고 거친 광야의 증거지요. 제 눈물을 먹고 사는 가시나무에 신성이 깃든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스스로도 주목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모세의 마음밭은 아니었을까요? 모세의 힘은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보다 거기서 주님의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마음은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풍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도 정직할 때, 스스로 움직여 세상을 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체념과 절망으로 황폐해져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어린 날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가 이집트인이 아니란 것을 알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이집트 관원을 살해했던 게 아닐까요? 그 사건으로 화가 난 파라오가 모세를 잡으라는 명을 내리자 모세는 사막으로 도망칩니다. 모세의 정의감은 하루로 끝이 났습니다. 그 사건은 모세가 자기 능력으로, 자신의 격정으로, 자신의 정의감으로 일군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공이 생기기 전에 정의감이나 격정은 진짜 무력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망자 모세는 미디안이란 사막지역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유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아이를 얻고 나서 모세가 고백합니다.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이게 무슨 아들을 얻은 자의 고백입니까? 차라리 악몽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자의 한숨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모세의 삶이 얼마나 적막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40년을 살았습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을 모세는 기대도 없이, 희망도 없이, 눈물도 없이 그저 살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체념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를 본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을 때였지요.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는 불붙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타들어 가지는 않았던 거지요. 모세가 의아하게 여길 즈음에 거기서 모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비록 떨기나무처럼 존재감이 없는 삶, 황폐한 마음일지라도 어린왕자가 노을을 지켜보듯이 고요하게 지켜보고 있으면 거기서 신성한 불꽃이 피어올라 신을 벗게 할지도 모릅니다. 샤갈의 모세처럼 새로운 운명을 향해 ‘나’를 던져가고 싶지 않나요?

 

빈센트 반 고흐<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에>

마음 안에 번민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또 번민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번민을 모르고는 인간이 될 수 없고, 번민에 사로잡혀서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거지요. 번민이 자유롭게 흘러 빛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길을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처럼 세파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고백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진짜 번뇌는 별빛, 아닌가요?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는 붓 터치로, 마음을 다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은 역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있으면 분명히 느낍니다. 고흐에게 그림은 길이고, 혈관이고, 생명이었음을.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있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는 강물소리가 들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린다. 나는,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거리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어. 별은 심장처럼 파닥거리며 계속적으로 빛나고,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트와일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어.”
귀가 욱신거린다는 것으로 봐서 귀를 자른 후의 그림이지요? 왜 멀쩡한 귀를 잘랐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질문으로 질책을 대신하는 사람은 욱신거리는 귓속에서 강물소리를 듣는 이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강물 소리를 따라 강으로 걸어 나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빛 터지는 세상을 그려낸 신성한 작가는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 자신이 심장처럼 팔딱거리는 살아있는 별이었음을. “저 맑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하는 고흐의 말을 곱씹어보면 마디마디 아픈 이 삶을 통과하지 않고 홀연히 아름다운 별빛으로 빛날 수도, 흐를 수도 없는 겁니다.

별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저렇게 맑게 빛나는 걸까요? 고흐는 얼마나 독특한 운명이었기에 별빛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걸까요? 연인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마침내 물감 살 돈도 없었던 고흐, 그 쓸쓸하고 팍팍한 삶이 앗아간 꿈이 저렇게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요?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그렇게 아파야만 했던 걸까요?

누가 그러더군요. 고흐는 정신병으로 최후를 맞았는데, 그렇다면 그의 그림도 위험한 게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생각합니다. 무의식의 비밀을 엿본 대가로 감당할 수 없는 형벌로 무너지면서까지 건져낸 그림이 ‘별이 빛나는 밤’이라면 위험한 만큼 가치 있는 것일 거라고.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는 생레미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또 별밤을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고, 교회가 있고, 평화로운 마을이 있는 가운데 달과 별이 빛나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저 별밤 아래 비틀거리는 두 남녀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별밤에 취한 것 같지요? 가슴에 별밤이, 별밤에 취한 연인이 살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이룩한 게 많은 삶이라도 그저 팍팍하기만 한 건 아닐까요? <안녕, 내 소중한 사람이여>에서 아사다 지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이 밀려올 때는 별을 보라고.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시시한 일로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앓고 있는 문제가 시시해질 때까지 별을 보고 있으면, 잊고 있었던 진짜 소중한 것들이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트와일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어.” 아마도 고흐는 정말 오랫동안, 어쩌면 밤을 새워, 푸른 대기를 뚫고 나와 명멸(明滅)하는 하늘의 별을 우러렀나 봅니다. 별을 보지 못하면 꿈을 꿀 수 없고, 꿈이 없는 인생에게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기대 쉴 수가 없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상처입은 남자>

눈은 마음에 창이지요? 화가 나면 열이 눈으로 올라오고, 불안하면 눈빛이 흔들립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안정적인 사람은 눈빛이 맑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아니, 저 그림의 남자처럼 칼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프면 어떤 눈빛일까요?

쿠르베의 '상처 입은 남자'는 쿠르베의 자화상 중 하나입니다

쿠르베는 법적으론 평생 독신이었습니다. 빌지니 비네일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구속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쿠르베는 평생 저 그림을 곁에 두고 아꼈다고 합니다. 고독이 운명인 사람답지요? 외부에서 기습적으로 덮치는 것이라 생각되는 운명이란 것도 어쩌면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요?

보십시오, 저 남자! 손동작으로 봐서 분명히 심장 근처에 상처가 깊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기막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독이 운명인 사람답게 큰 나무에 기대 누워 편안히 눈을 감고 조용히 아픈 곳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시선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 그림에 사로잡히면 곧 저 그림의 정신적 힘은 해골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저 그림의 매력은 마리아의 오른손에서 옵니다.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지요? 해골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해골로 흐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해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촛불에 씻긴 눈으로 내면을 응시하면서 홀연한 지혜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로 상징되는 무상(無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무상의 표상인 해골이 무섭지 않은 마음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로 정화의 의식을 올리는 영혼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자이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때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요.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나와도 저 그림은 불교적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합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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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벼랑 끝에 누워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보십시오. 저기가 바로 코카서스 산 절벽입니다. 저 절벽에서 그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돌아설 수도 없게 포박되어 있습니다. 거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프로메테우스의 옆구리를 쪼아 간을 꺼내먹고 있네요.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치의 연민도, 죄책감도 없는 독수리의 표정이 제우스의 신조(神鳥)답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보십시오. 그는 일방적으로 간을 파 먹히면서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지만, 주눅 들어 있지도 않고 두려워 떨지도 않지요? 그런 그는 독수리에게 먹혀도 독수리의 먹이가 아닌 겁니다. 아니, 그는 독수리 뒤에 있는 제우스와 투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을 사랑한 죄로 인간에게 생명의 불을 선물하고 싶어 했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벼락에서 불씨를 훔칩니다. 당연히 제우스는 화가 났지요. 헤르메스를 시켜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 절벽에 포박하고, 신조 독수리를 보내 간을 쪼아 먹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매일 밤 되살아난다는 것을. 낮이 되면 독수리는 싱싱하게 되살아난 간을 다시 파먹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그렇게 고통과 재생을 반복합니다.

불이 생명인 것처럼 간 또한 생명입니다. 간은 생명의 장기입니다.

당신의 간을 공격하는 건 잔챙이가 아니라 제우스의 독수리입니다. 고통의 크기만큼 생명의 간이 싱싱해집니다, 힘이 생깁니다. 언제나 새로운 세상은 고통 너머에서 옵니다.

쉬잔 발라동<아담과 이브>

<순례자>에서 파울로 코엘료가 말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기는 지켜질 때 가장 안전하지만 지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의식은 금기가 깨지는 고통의 현장에서 성장을 시작하니까요.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것이 에로스의 금기였다면 에덴의 금기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잔 발라동의 ‘아담과 이브’는 독특합니다. 우선 아담과 이브의 표정이 확실히 구분됩니다. 대조적이지요. 두려움 없는 여자와 두려움으로 비겁해진 남자! 시간이 저절로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는 무구한 여자와 원하는 것조차 제 손을 더럽혀서는 얻지 않으려 하는 야비한 남자! 유혹할 의도 없이 유혹적인 여자와 유혹당하면서도 제대로 사랑할 줄은 모르는 남자!

수잔 발라동, 그녀는 19세기 파리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납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칼바람 같은 가난을 겪으며 그녀는 곡예사로, 세탁부로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여인이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 되면서 그림을 배우고 그림을 배우면서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녀가 르누아르, 로트렉, 드가와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 그들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까요,

그녀가 그린 아담의 몸짓을 보십시오. 이브는 두려움 없이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려하는데, 아담은 그 열매를 따려는 이브의 손목을 잡고 있습니다. 아담은 열매를 따는 이브를 도우려는 걸까요, 아니면 따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는 걸까요? 아담은 선악과 앞에서 이브를 부추기며 억누르며 나중을 위한 변명을 만드는 치사하고 비겁한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수잔 발라동이 성서의 아담을 제대로 해석한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은 선악과를 먹었으면서도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여자 때문에 먹게 되었다고 변명하는 존재가 창세기 속 아담입니다.

 

 

렘브란트<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얼굴이 보이는 듬직한 남자가 요나단이니 칼을 찬 뒷모습의 사람이 다윗이겠습니다.

저 그림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속에 다윗이 차고 있는 저 칼은 요나단의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이별의 정표로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칼은 그렇다 치고 목동이었던 다윗의 옷도 생각보다 화려하지요? 그것도 요나단이 건넨 것입니다. 저 시대에 자신의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은 자기를 나눠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종의 도원결의였던 셈이지요. 요나단과 다윗은 그만큼 가까웠습니다.

뒷모습만으로도 전달되지 않습니까? 요나단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다윗이 요나단의 품에서 절망스럽게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저렇게 요나단의 품에 무너져 있는데도 다윗이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우정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후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이 전사했을 때 다윗이 썼던 조가(弔歌)가 자연스럽습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단이여, 나 애통하오. 내게 소중했던 형이여,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에로스 사랑보다 아름다운 우정을 아십니까, 친구의 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요나단 같은 속깊은 친구가 있으십니까? 사랑이 소유가 아니듯 우정도 소유가 아닙니다. 저 그림을 보니 진정한 우정은 옆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렘브란트<탕자의 귀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선 울어도 되는구나, 외롭다고 하소연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아들의 영혼을 만져주는 아버지가 피로에 지친 아들의 생 전체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아예 눈이 먼 것 같은 무표정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 그 손에 몸을 맡긴 채 이제 평온을 찾은 듯 무릎을 꿇고 앉은 탕자, 탕자의 헤진 옷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발바닥이 고된 방황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더러는 체면 때문에, 더러는 생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외면하고 억눌러 왔던 남루한 내 영혼입니다.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우리들의 영혼인 거지요.
알려졌듯 탕자는 실패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거지로 돌아온 초라한 자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실패하지 않는 게 생의 목적은 아닌가 봅니다. 더구나 아버지 곁에서 못마땅한 질시의 눈으로 탕자를 바라보는, 성실하기만 한 형의 싸늘한 눈길을 보면 반듯하게만 살아온 선한 삶이 오히려 위태로울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저 눈을 보십시오.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자의 눈입니다. 과거를 규명하려 드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자의 포근한 눈이지요? 저런 눈을 가진 아버지가 있어야 기진맥진한 인생이 쉴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탕자의 등에 얹힌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보십시오. 진짜로 신의 손길 같지 않습니까? 탕자가 자기 안의 눈물을 모두 토해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런 손길을 알아야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추스를 수 있습니다. 저런 품에 안겨봐야 생을 압니다.

아버지는 굴종을 요구하는 지배자여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능력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입니다. 저 탕자의 아버지는 바로 긍정적인 아버지의 원형입니다

 

윌리엄 퀼러 오처드슨<아기 도련님>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을 보십시오. 아기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지요? 아기가 저렇게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건 아기의 마음을 읽어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에서 권위를 벗기면, ‘엄마’ ‘아빠’가 됩니다. “엄마” “아빠”라는 말은 지극한 사랑의 말입니다. 지금 저 상황의 아기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빨리 배우게 되는 바로 그 말도 “엄마”일 것입니다. 그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배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말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말이기도 합니다. 그림 속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보십시오. 저 시절 누가 있어 저 사이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귀스트 르누아르<빨래하는 여인들>

이제 막 빨래를 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는 저 여인, 르누아르가 좋아한 여인 같지 않습니까? 뒷짐을 지고 신사를 흉내내고 있는 소년은 내심 자기가 엄마를 지키고 있는 거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보십시오. 냇가에 물풀들이 무성하지요? 돌 틈에 부딪치며 깨지며 흐르는 물들이 물풀들을 먹여 살렸네요. 저런 냇가가 건강하고 젊은 냇가입니다. 파란 물은 부지런히 명랑하게 흐르고 여기저기 나뭇잎들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겠지요.

볕 좋고 바람 좋은 날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한 손엔 빨랫감을 안고, 다른 손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저런 냇가로 모여들었겠지요. 저마다 냇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빨래를 하다보면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맨발이 되어 물장구를 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놀 것입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해보셨습니까,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두 여인은 벌써 자리잡고 앉아 빨래를 하고 있네요. 한 여인은 빨래를 돌 위에 얹어놓고 치대고 있고, 다른 여인은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궈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빨래에 열중하고 있지요?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저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을 보고 있자니 몸을 움직이는 평범하고 단순한 일일수록 몸에 붙으면 묘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힘 있게 치대는 손동작 속에 근심을 날려 보내며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삶은 생산성이 높은 삶이 아니라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일들이 행복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 아닐까요?

빈센트 반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이제 주름진 얼굴, 불거진 광대뼈에 가려 있던 농부들의 순한 눈이 들어옵니다. 그들의 눈은 눈망울이라 해도 좋을 만큼 순하디 순한 소의 눈을 닮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또 보입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불거진 심줄의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온전한 식욕이.“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을 그리고 싶었다. 그 손은 그들이 땅을 판 손이기도 하다. 농부는 목가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하다. 시골에서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는, 먼지가 뒤덮인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숙녀보다 멋지다.”

고흐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김을 매고 열매를 거두어 먹는 농부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만종>

살바도르 달리 황혼의 격세유전

<황혼녘의 격세유전>이라는 그림이었다.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을 재구성한 그림이다. 재구성이라고 해봐야 내 눈에는 악취미의 패러디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안 그렇겠는가, 황혼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남녀 중 남자의 얼굴은 해골로 변해 있고, 여자 쪽의 몸에는 창 같은 것이 꽂혀 있으니. 그리고 전원 풍경은 황량한 바위 벌판으로 변해 있으니(퍼온글)

저기 저 밀레의 만종엔 소박한 시골생활의 힘이 있습니다. 우아하고 품위있게 살게 하지는 못하지만 땅을 살피고 생명들을 보살피고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게 하는 힘! 그러다 보면 직관을 믿게 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고 매사 감사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흐가 그토록 저 그림을 좋아했나 보지요? 고흐가 사랑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행복으로 충만한 여자의 표정과 남자의 손동작이 인상적인 ‘유대인 여자’, 그리고 저 그림 ‘만종’입니다

만종에 관한 풍문을 들었습니다. 저 감자 바구니가 원래는 아기의 관이었다나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나 했다니 어마어마하게도 그 근원에 살바도르 달리가 있네요. 저 그림을 본 달리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달리답습니다. 그 불안감은 적중해서 원래 저 바구니에 담겨 있었던 것은 감자가 아니라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죽은 아이의 시신이었다는 거지요. 그것을 끔찍하게 여긴 밀레의 친구가 바꾸라고 조언해서 밀레가 바꾼 거라는 겁니다.

밀레는 다릅니다. 밀레는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 불편하지 않은 정서 속에서 나서 자란 사람입니다. 밀레는 생에 감사하는 농부들을 그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에 저녁종이 울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
저렇게 기도하는 손이 삶의 중심인 한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들이 손을 모으는 것은 사람이 약해서 종교로 도망가는 일이 아닙니다. 저들은 사람을 믿고 생명 있는 것을 믿고 자연을 믿어서 초자연의 신비를 뱃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접붙이는 사람>

생명에 관여하는 저 농부, 보십시오! 의례를 집전하는 성직자 같지 않습니까?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생명의 신을 찬양하고 생명의 신께 기도를 올린다 해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나무의 접을 붙이는 지금 저 농부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저절로 시선이 가는 것은 저 농부의 행위를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입니다. 저런 든든한 시선의 지지를 받으면 농부의 행위가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사랑스러워질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내게 가장 소중한 아이를 통해 받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내 아이들이 놀아야 할 마당입니다. 기원전 30년, 베르길리우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로마의 농촌을 살리는 길이 생명이라 믿었고, 19세기의 밀레는 생명의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인격의 중심이고 인간의 미래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에 충실한 자 생명을 거두고, 죽음에 충실한 자 죽음을 거둘 것입니다. 지금 내가 거두고 있는 것은 또한 내가 뿌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삶은 정직하고, 내가 심어둔 과거는 어떤 모양으로든 나를 찾아오니까요.

클로드 모네<수련 연못>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모네에게는 수련이 있습니다. 수련은 모네의 사랑이었습니다. 중년부터 이어진 평생의 사랑. 말년에 녹내장에 걸려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황색과 붉은색 없이 온통 블루인 말년의 그림들이 그의 병의 증거라고, 그 병에 걸리면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하지만, 그때 모네의 수련은 경계와 경계를 지우면서 훨씬 몽환적이고 훨씬 차분해지며 훨씬 신비해집니다

저 그림, 좋지요? 참 좋습니다. 연못이 온통 생명 있는 것들로 꽉 차 있고 물밖에도 나무들이 무성한 것이 한여름입니다. 빛의 화가 모네는 빛 속에서 사물들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즐겨 그렸다지요?

그림 속의 저 일본식 다리는 모네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지베르니에서 모네는 꽃을 심고, 다리를 놓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수련이 왜 수련인지 아십니까? 물위의 꽃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수련(睡蓮)의 수는 잠잘 수(睡)입니다. 수련은 태양빛이 아주아주 강렬해야만 물속에서 천천히 도도하게 올라와 화사하게 피어나다가 빛이 조금이라도 시들해지면 물속으로 돌아가 잠들어버립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 햇살과 물이 만나 반짝이고 물결과 바람이 만나 일렁이는 세계에서 생명을 부여받은 연꽃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햇살과 물과 바람 없이 연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한 송이 꽃 속에는 우주가 들었고, 우주는 한 송이 꽃, 세계일화(世界一花)입니다.

 

폴 세잔<생 빅투아르 산>


세잔은 말년 20년 동안 고향의 산, 생 빅투아르를 그렸습니다. 아이에게 산은 놀이터고 심신이 지친 도시인들에게 산은 휴식처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산을 그리고 또 그린 화가에게 산은 무엇이겠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젤과 캔버스를 메고 로브 언덕에 올라 생 빅투아르를 그린 세잔! 산의 마음이 되어 산을 그린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는 단순히 산을 경배한 것도 아니고 소일거리로 산을 그린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낳아주고 지켜준 산을 바라보며 자신이 산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엄마가 아이를 목욕시키듯 기꺼이 정화되는 기분으로 산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잔은 관찰의 힘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관찰은 단순히 보는 게 아닐 겁니다. 세잔이 말합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자연을 탐구해왔다. 본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그려야 한다.” 잡생각을 지워가며 침묵 속에서 조용히 산을 바라보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집요하게 화가를 사로잡았던 원근법은 어쩌면 3차원 세계의 환영일 수 있다는 것을. 세잔은 원근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나서 바로 ‘색’의 혁명을 이룩합니다. 세잔은 인상파 화가면서도 순간적인 빛 너머의 존재에 집요했습니다.

세잔이 말합니다. “생 빅투아르는 나를 이끌었다. 그 산은 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은 생 빅투아르의 의식이다.” 세잔에게 생 빅투아르는 신이고 성전이며, 세잔은 생 빅투아르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릴케는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종교를 그렸다고.

빈센트 반 고흐<두 송이의 해바라기>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존재를 솔메이트(Soulmate)라고 하지요? 솔메이트는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해바라기의 솔메이트는 태양, 태양입니다. 박두진의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해바라기가 사랑한 해일 겁니다.
두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별밤 같은 배경의 터키블루로 인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해를 닮은 둥근 얼굴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바람에 쓸리고 쓸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태양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바람을 맞고 또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폴 고갱<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

고갱은 이렇게 썼습니다. “태양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다워 자꾸만 쳐다봅니다. 여인의 맨발을 보고, 나도 맨발이 됩니다. 햇빛을 머금은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맨발로 온 들을 거닐었습니다. 여인이 그립습니다.”

저 여인 같지요?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아도 저 여인의 눈빛은 지나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심이 있는 자의 차분한 눈빛, 자신을 보는 이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눈빛!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눈빛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고갱의 다른 그림의 제목을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타이티에서 고갱의 그림은 그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사실 저 여인에게 압도되는 것은 슈퍼모델급 미모여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다져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있으나 자연에 속해 있습니다. 그녀가 사는 마을, 그녀의 친구들이 보이지요? 머리에 꽃을 꽂은 맨발의 여인들은 모두 자연의 품속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과일은 그녀가 직접 딴, 그녀의 일상일 것입니다. 그녀를 보니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자연, 자연입니다.
고갱은 순수한 프랑스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혈관엔 페루인의 피가 흘렀고, 그의 삶엔 페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하고 내성적이었던 고흐와는 달리 끝까지 오만했던 그가 문명의 땅을 떠나 타이티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피의 부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은 산에 기대 살던, 혹은 바다에 의지에 살던, 혹은 대지에 뿌리고 내리고 살던 시절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매너 좋은 도시인으로 깔끔하게 살아간다 해도 문득문득 갑갑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갑갑함은 삶이, 혹은 운명이 내게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속에 살다 도시인으로 죽었다는 문장 속에 내가 있다면? 그건 숨이 막힙니다. 자연을 모르고는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우리는! 살아있는 흙 위를 다녀야 하는 건 뱀만이 아닙니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하는 건 독수리만이 아닙니다. 햇빛에 자신을 온전히 여는 건 그림 속의 저 나무들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