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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고미숙,박지원)

Bravery-무용- 2017. 2. 28. 15:20
 
저자 고미숙, 박지원|작은길 |2012.11.09

 『열하일기』는 조선이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행단에 연암 박지원이 공식임무가 없는 수행원 자격으로 5개월 간 동행하면서 남긴 연행 기록이다. 조선의 연행사들이 남긴 500권에 이르는 연행록 중에서도 『열하일기』는 백미로 손꼽힌다. 그러나 고종 재위 기간에 우의정까지 지낸 손자 박규수도 조부의 문집을 간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정도로 『열하일기』는 문제작이었다.

만주족 오랑캐가 명을 몰락시키고 청을 건국한 이래 조선은 명에 대한 존숭과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소중화 사상과 북벌론을 지배적인 이념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논리인지 그 근원부터 근거가 빈약하고 한 톨의 실리조차 건질 게 없음을 꿰뚫어보고, 도도한 논리와 장대한 비전으로 이를 공략한 사상가이자 문장가가 연암 박지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과 문장의 진수를 보여주는 텍스트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원전의 진면목을 온전히 전하면서도 고전을 읽는 현재적 의미까지 담아내는 작은길출판사의 ‘고전 찬찬히 읽기’ 시리즈는, 첫 책으로 고미숙 선생님의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를 새롭게 선보인다. 장장 십 년 동안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과 우정을 나누어온 저자는, 연암으로부터 지금도 변함없이 선물 공세를 받는다.

이번에 받은 선물은 『열하일기』라는 고원 곳곳에서 ‘채굴한’ 10편의 명문장들이다. 저자는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숨은 보석들을 발굴하여 그 영롱한 빛을 지금여기의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 출생.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수유+너머’를 떠나 감이당(gamidang.com)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은 ‘몸, 삶, 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문의역학’을 탐구하는 ‘밴드형 코뮤니타스’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삼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전2권)과 달인 삼종세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동의보감 삼종세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그리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이 영화를 보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등이 있다.

머리말 : 열하일기, 숨은 보석을 찾아라!
Intro 그대, 길을 아는가?
출발
벗은 ‘제2의 나’다
연암이 ‘연암’으로 들어간 까닭은?
청나라로부터 배우다 - 북학北學
검문
길은 ‘사이’에 있다
1. 소경의 평등안: 이용후생, 그리고 정덕正德
책문
여래와 소경
득룡이
정덕正德을 환기하라!
잠꼬대
‘청 문명의 장관은 기와 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덧달기 - 쌍림과 장복의 대화
2. 호곡장好哭場: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
투전

말 꼬리
호곡장好哭場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덧달기
3. 호질虎叱 : 너희가 ‘범’을 아느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호질>의 ‘발견’
미스터리
주인공은 ‘범’
인간, 너는 누구인가?
4. 허생許生 : 황금을 보기를 뱀처럼 하라
연경 도착!
옥갑에서의 ‘야화’
변승업卞承業
허생을 인터뷰하다
5.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만리장성에 담긴 뜻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열하로
굶주림과 잠고문
창대의 수난
혹부리 여인들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
원혼들에 대한 비가悲歌
덧달기
6.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 내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말(馬)에 대한 깊은 성찰
위태로움에 대하여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一夜九渡河記)
마음의 행로
마침내 열하!
잠과 꿈의 ‘사이’
7. 상기象記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
상방 탐방기
코끼리의 형상, 코끼리의 힘
하늘이 코끼리를 낸 뜻은?
차이를 사유하라!
덧달기 - 지전설
8. 판첸라마 대소동 : 천하의 형세를 헤아리다
폼생폼사
서곡
판첸라마
황제
황금궁전
파사팔巴思八
정탐꾼
천하의 형세
9. 환희기幻戱記 :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호기심 제왕
신기한 요술나라
엽기적인 너무나 엽기적인
눈속임
꿈속에 또 꿈
소경의 눈물
길 위의 삶
더 읽을 책들
박지원 연보
열하일기 원목차

 

저자가 5년 전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열하일기의 진수를 선물하고자 썼던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의 개정판이다. 한성에서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연경으로 돌아와 한양에 이르는 장장 5개월 간의 장대한 여행기가 한 장의 지도 위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처럼 '열하일기' 26편의 전모가 한 편의 로드무비이자 길 위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모험, 그리고 사유의 대여정으로 생생히 되살아난 것은 오래도록 연암과, 또한 '열하일기'와 ‘찐한’ 우정을 나누어온 저자 고미숙의 애정과 편력이 살아 숨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번 개정판을 통해 230여 년 전 연암의 여행길에 동행하는 행운을 누리시길 바란다.

유목적 여정이 탄생시킨 "오천 년래 최고의 문장"

조선 후기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연암의 글들은 1900년이 되어서야 창강 김택영에 의해 '연암집'으로 묶여 간행되었다. 김택영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삼국사기의 [온달전]과 더불어 "오천 년래 최고의 문장"이라 평했다. 이 같은 평가의 근거는 무엇인가. 반드시 한문으로 쓰인 원전을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때 그 자리의 연암이 되어 보는 것이다. 상현달마저 고개 너머로 떨어져 천지가 괴괴한 때, 곁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한 필의 말에 의지하여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장성을 넘어간다.

아, 슬프다! 여기는 예로부터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이다. ... 그토록 길길이 날뛰며 싸우던 전쟁터건만 지금은 온 천하가 태평하여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어 수많은 골짜기들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 본문 174~175쪽

고북구가 어떤 곳인가.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목이자, 새외로 통하는 관문 가운데 험하기로는 고북구만한 요새가 없다. 이곳을 통과하면 산천의 풍경과 지세, 풍속 따위가 자못 달라지는 북방 오랑캐의 땅이기도 한 터, 고북구는 중국 역사 내내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스러져간 전쟁의 원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짙은 어둠과 기괴한 기운이 어우러진 가운데 "연암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에 휩싸"여, 남은 술에 먹을 갈아 천고의 명문장을 써 내려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연암의 것이라기보다 장성에 깃든 원혼들이 연암을 통해 말을 건넨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단 [야출고북구기]만 그렇게 탄생한 게 아니다. '열하일기'를 장식하는 명문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연암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나왔다. 동쪽 변방 조선의 지식인 연암은 조선을 규정하는 어떠한 주류적 가치와 통념에도 걸림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사되는 청문명의 정수를 다각도로 포착할 수 있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청 문명의 장관은 기와 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는 명제이다. "기와 조각과 똥오줌, 가장 낮고 천한 것에서 가장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아내는" 연암의 통찰력이 구축한 "탁월한 문명론"이기 때문이다. 연경을 유람하고 돌아온 선비들이 요동의 백탑, 산해관, 유리창 따위를 제일 장관이라며 열거하고, 일류 선비들은 왕후장상, 서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머리를 깎았다는 이유로 개돼지와 마찬가지 취급을 한다. 이에 연암은 삼류 선비를 자처하며 깨진 기와 조각을 모아 천하의 그림을 그려내고, 똥거름마저 각양으로 쌓아올려 금덩어리처럼 모시는 저 제도를 본받아야 진정한 북벌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역설한다. 정말 근원적이고도 통쾌한 논리가 아닌가. 장자가 말한 붕새의 눈이나 불가에서 말하는 여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연암의 편견 없는 안목과 전복적 사유는 열하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천자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천하의 모든 진귀한 종족과 산물들이 열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길들이지 않은 각종 야생동물들이 우리 안에서 눈빛을 번득인 채 수레에 실려 간다. "붉은 굴레를 씌워 말을 끌고 가듯 하는" 사슴이 있는가 하면, 키가 거의 말만 한하고 용맹하기가 호랑이와 맞먹는 개도 있다. 난생처음 타조를 목도하기도 한다. 이미 연경에서 한번 마주친 코끼리를 열하에서 다시 볼 기회를 얻는데, 이번에 본 코끼리의 행동거지와 활약상은 연암의 상상력과 사유를 "우주적 차원으로" 비약시키면서 [상기象記]라는 명문을 낳게 한다.

우리가 배운 것이라고는 생각이 소 말 닭 개 정도에 미칠 뿐, 용 봉 거북 기린 같은 짐승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 죽이니 그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서운 존재라 말한다면 조금 전에 말한바 이치에 어긋나고 만다. 대저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 만 배나 더한 것임에랴. - 본문 215쪽

저자는 여기에 ‘코끼리 철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상기]가 설파하는 건 ‘차이’에 대한 사유라고 지적한다.

우주의 변화는 실로 무상한 것이어서 하나의 단일한 척도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 닭이나 개를 보고 산출된 가치는 닭이나 개에게만 적용될 뿐, 그것을 용이나 거북에게까지 적용하려고 들면 바로 탈이 난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폭력’이란 단 하나의 기준에 의거하여 차이들을 완전 무시해 버리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럴 때 그 기준은 그저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초월적 지위를 획득한다. - 본문 216쪽

이렇듯 이 책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내내 명문장과 명해설의 멋들어진 향연을 즐기게끔 한다. 그 비결은 원전을 성실히 독해하고 현재적 맥락에서 새롭게 변주하는 저자의 내공일 것이다.

유쾌한 시공간 그리고 눈부신 비전

고미숙 선생은 손수 창안한 고전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의미있는 고전을 발굴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열하일기'가 그 첫 성과물이었음은 웬만한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왕복 장장 6천여 리, 5개월의 여정에서 탄생한 역작을 재발견하고 리라이팅한 책이 출간된 해가 2003년이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한 총서가 간행되어 거기에 '열하일기'가 포함된 것이 1968년이었고, 그것이 1997년 현대적인 장정으로 재출간되기 전까지 변변한 완역본도 없던 때였다. 전문 연구자의 정석적인 해설서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존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이유가 있듯, 글이란 것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저작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고미숙 선생의 글쓰기 지론은 ‘나는 왜 이 글을 쓰느냐’에 답해야 한다는 것! 더군다나 먼지냄새 나는 고전이 21세기 지금까지 읽힌다는 건 시대마다 독자의 요구가 추동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고전평론가 혹은 고전을 다시 쓰려는 작가라면 자신만이 가진 ‘특이점’의 그물로 포획한 고전의 의미를 통역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 충실한 저작일 뿐 아니라, 전작에 대한 탁월한 변주라고 할 만하다. 전작이 '열하일기'를 탈근대적 사유가 충만한 텍스트로 분석한 과감한 시도였다면, 이 책은 원전의 텍스트와 보다 밀착하여 대화를 나누듯 써가면서도 그 고유한 사유의 편력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또한 청소년 독자들도 부담없이 읽기에 적합하도록 썼기 때문에 폭넓은 독자층이 두루 함께 탐독해볼 만하다.

고전 찬찬히 읽기, ‘고찬찬’ 시리즈!

고전이 교양인의 필독목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깊이 있는 해설서와 공들여 번역한 완역본들이 출간될 때마다 고전 독자들은 고마움과 설레임을 동시에 느낀다. 풍요로운 고전의 바다에 이제 여기, 고전읽기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하는 시리즈를 내놓는다.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겠지만 고전읽기에는 다른 왕도가 없다. 고전이라는 텍스트가 본래 그렇게 쓰였듯, 그 느린 걸음과 깊은 호흡을 온전히 음미하며 ‘찬찬히’ 읽은 것만이 최상의 방법이다. 점자를 배우듯 시대의 낯선 언어와 이질적인 삶의 요철들을 나의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실감해보자. 고찬찬 시리즈는 찬찬히 읽는 방법에 딱 맞춤한 장편고전 텍스트를 첫 탐사지로 선정했다.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를 필두로, 남산강학원의 패기 넘치는 필진들이 가세하여 장편고전 세계로의 탐사여행에 멋진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 앞으로 나올 책들 :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서유기'(오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데카메론'(조반니 보카치오) 등.[예스24 제공]

책속으로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둔다고 했던가.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70세 만수절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연암의 집안은 대대로 노론 벌열가문인 데다 삼종형은 영조대왕의 극진한 사람을 받은 화평옹주의 남편, 곧 부마도위로 왕족의 일원이었다. 박명원은 평소 연암이 청나라 문명을 동경하는 걸 알고서 그를 자신의 개인수행원(자제군관)으로 임명해 준 것이다. 말이 수행원이지, 실제론 특별한 공무가 없는 일종의 ‘프리랜서’였다. 연암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빛나는 사건이자 화려한 외출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 p.34

거기에 비춰 보면 인간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범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가, 마소를 먹으면 그때부터 원수라고 떠들어 댄다. 자기네들이 마소를 부려 먹기 때문일 텐데, 그럼에도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다. 그러고도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한다. 그러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우리 범들이 너희 인간들을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주어야 하겠는가?” --- p.124

생각해 보면, 삶이란 참 얼마나 우연투성이인지. 한양을 떠날 때만 해도 여행의 목표는 연경이었다. 연암으로선 연경을 유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찬 일이었다. 헌데, 이제 느닷없이 동북방의 요새지 열하로 가게 되다니. 연암으로선 압록강을 건널 때 못지않은 두려움과 설레임을 느꼈을 터이다. 게다가 조선인으로선 처음 거기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잠고문에 굶주림까지 겹친 무리한 여정으로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건만 연암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에 휩싸였다. --- p.176

명심이 바로 그것이다. ‘어두운 마음’이란 사사로운 집착을 다 놓아 버린 상태를 뜻한다. 그리 되면 당연히 나 아닌 외물에 대한 고정된 상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와 대상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도 아니고 외물도 아닌 ‘활연관통'의 경지로 진입하게 된다. 이 글의 클라이막스,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는 대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물이 옷이 되고, 물이 몸이 되고, 물이 마음이 되는 경지,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도'다. --- p.194

어디 장님만 이러하랴. 우리네 삶이 온통 이런 식일 터, 보이는 걸 그냥 좇다 ‘무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장님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도로 눈을 감아야 하듯, 우리 또한 보고 듣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심연을 응시해야 할 것이기다. 그때야 비로소 양변을 떠나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사이에서 사유하기’와 ‘도로 눈을 감는 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는 셈이다. --- p.281

2017.2.27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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