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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니시즘

Bravery-무용- 2013. 10. 2. 11:37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산안농장

돈도 필요없는 사이좋고 즐겁게 사는 마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건 간에 마음속에 각각의 이상향(Utopia)을 두고 산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소설에서 비롯된 말로 ‘이상향 또는 이상적인 나라’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말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다소 모순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상향을 찾는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물질적, 소모적 삶의 방식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산안농장 사람들이 전원의 넓은 들에 건설한 그들의 이상향을 어떻게 평화롭고 알차게 가꾸는지 그 이야기를 통해 해답을 찾아보자.

제약단지로 알려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향남제약공단. 공단을 돌아 낮은 구릉과 황토밭을 사이에 두고 산길로 3∼4km 가량 들어 가다보면, 전날 기습적으로 내린 하얀 눈이 덮인 들녘에 자리잡은 파란색 지붕의 계사(鷄舍)가 하나 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곳은 야마기시즘 사회경향실현지라는 정식명칭 외에‘돈이 필요 없는 사이좋고 즐거운 마을’로 세상에 아름아름 알려진 산안농장이다.

현재 산안농장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일본인을 포함하여 48명이다. 84년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16년을 함께 해온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를 모시고 여기로 들어온 사람들, 여기서 결혼해 부부가 된 이들도 있고, 이 곳을 선택한 지 얼마 안 되는 미혼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학생을 가르치던 교사,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 농사를 짓던 사람,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사람들로 저마다 쉽지 않았을 결정 끝에 여기서 또 다른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들은 양계부, 채소부, 생산물을 도시에 공급하는 공급부, 세탁과 식사를 맡는 생활부, 아이들의 양육과 학습을 맡는 양육부에 속해 일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특강을 받은 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회원도 2천 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야마기시즘 사회실현지, 즉 산안농장 운영의 원칙은 ‘私意尊重公意行’. 즉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공동의 뜻을 실천해 나간다는 뜻이다.

안팎으로 이루어지는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주관적인 판단과 그것을 고집하는 자세는 서로가 대립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고정적으로 단정하지 않고, 마치 일반 가정의 가족회의처럼 연찬이라는 형식을 빌어 운영해 나간다. 이런 공동체 생활의 모태가 된 것은 야마기시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야마기시즘이란 1953년 야마기시 미요조라는 일본인이 제창한 공동체운동으로, 현재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스위스, 독일, 미국 등 세계 곳곳에 그 실현지가 분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의 공동체 생활은 종교적 차원에 바탕을 두지 않을까 의문을 갖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은 종교 단체가 아니며 또한 신앙적인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야마기시즘을 담은 책자나 텍스트는 없다.

보수와 분배가 없는 무소유 공동체

멀리 서해안 고속도로가 보이는 산안농장은 마을언덕 양편 5만 평의 너른 농경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한복판에는 구계사 10동이 있고, 한쪽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다 보면 신계사 8동이 자못 큰 규모로 다가온다. 주변으로는 다양한 채소를 가꾸는 야채 비닐하우스와 밭, 연찬 강습장과 법인사무소가 마을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다. 한편 숙소로 쓰이는 2동과 생활관 1동, 어린이들의 교육 장소인 태양의 집과 공동식당, 생활관 1동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물론 산안농장이 처음부터 이런 규모의 모습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야마기시즘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60년대라고 한다. 그 이후 실험적으로 협업농장 형태의 공동체가 여러 개 세워졌지만 실질적으로 정착화 되지를 못했다. 그런데 84년 모든 재산을 털어 허허벌판인 이곳에 공동체를 이루고자 여섯 가족이 모였다. 쓰러져가는 비닐 움막을 집으로 정하고 황무지에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리고, 계사에 닭을 늘려가면서 농경지를 맨손으로 개간한 노력으로 오늘을 일구게 된 것이다. 그 사이 일부 회원이 바뀌기도 했지만 공동체 밑그림은 계속된 실천 속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춰 왔다.

야마기시즘 사회는 무소유를 근본가치로 하고 있다. 소유를 근간으로 할 때 허욕이 생기고 이것이 한없이 폭을 넓히려고 들어 인간과 인간끼리 대립, 심하면 폭력까지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야마기시즘 사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돈이 필요 없는 사회라는 점이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이 필요한 사람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한다. 실현지 내에는 필수품을 공급하는 곳이 따로 있다. 이 곳에는 지키는 사람도 없고 화폐를 사용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은 각종 물품을 모두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만일 이곳에 없는 물품이 필요한 경우, 그 품명과 수량을 쪽지에 적어 마련된 상자 안에 넣어 두면 연찬 형태의 검토를 거쳐 구입여부가 결정된다. 자유경쟁이 원칙이며 이윤 추구가 목적인 자본주의적 잣대로는 이와 같은 공동체를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된 의미의 노동에 대하여

공동체의 하루 일상사는 사실 행복한 닭들의 생활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회원들은 쉬고 싶으면 쉬고 일하고 싶으면 일을 한다. 바깥 사회와 같이 공휴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이 곳에서 연찬 때 시간을 맞추는 것을 빼고는 공동체 안에서 ‘꼭 해야 한다거나 무엇은 안 된다’는 식의 강요나 규칙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닭들이 알을 낳고 싶어 알을 낳듯 이들의 일 또한 즐거워서 하는 것이다. 자연을 가공해 재화를 창출하고 소유를 목표로 하는 노동과는 다른 의미의‘일’인 것이다.

공동체에서 회원들이 각 부서에 일을 맡을 때는, 각자의 적성과 바램에 맞춰 정해진다. 물론 이들은 6개월마다 한 번씩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다시 하고 싶은 일에 따라 배정을 받을 수도 있다. 애초에 일의 개념이 다르듯 이 곳 생산과 분배의 체계도 기존 사회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체계가 공동체 정신이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에게 있어 유정란 공급은 달걀을 사고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구매행위는 공동체 운동이 사회 속에서 펼쳐지는 연결점으로 간주된다. 질 좋은 농업생산물이 있고 공동체 운동을 이해하는 활용자들이 여기에 참여하는 형태이다. 공동체는 형태상으로 영농조합법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세금도 내고 농사에 필요한 지원도 받을 수 있지만 되도록 자립적으로 꾸려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생산이익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 명의로 환수하여 필요한 지출이외에 나머지는 재투자나 저축으로 남는다. 회원 각자는 자기가 필요하면 공동체 동의를 거쳐서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쓸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적, 공적 소유는 없고 무소유만 있을 뿐이다. 대개의 협업농장이 생산이익을 개인에게 분배해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 약화를 가져오거나 재투자 비용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경우에 비춰 볼 때 주목이 되는 부분이다.

양계 외에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이 먹는 주곡과 야채들을 상당량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리고 무와 고구마 같은 야채는 물론 고추장, 된장 등 일부 가공식품도 활용자의 요청에 따라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 농업생산물은 이익을 챙기기 위한 작물도 아니며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한 특용작물도 아니다.

교육의 객체가 아닌 주체인 아이들

양계 및 농업이 야마기시즘의 정신을 경제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라면,‘학육’은 공동체 특유의 정신을 교육에 반영한 것이다. 이 곳 마을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하나가 가령 지나가는 어른을 보면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내 것, 네 것 구별 대신 조화가 강조되는 이 곳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단면이다. 다만 공동체의 전체 어른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로서 부모 노릇을 공동으로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곳 어린이는 현재 15명. 어린이들은 일종의 공동 기숙사인 태양의 집에서 각자 공부방과 잠자는 방을 가지고 있다. 교사 구실을 맡은 학육부의 어른들이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돌본다. 공동체내에 자체 학교가 마련되지 않아 초·중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인근 일반 학교에 다니지만, 학교생활이 끝나면 나머지 시간은 공동체 생활로 꾸려진다.

아이들에게도 어떤 규칙이나 특별한 학습활동이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을 가르쳐 기른다는 교육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스스로 배워서 큰다는 학육(學育)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볼뿐이다. 참인간으로 자라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애정요소라 생각하여 과보호, 과간섭, 애완시 하는 맹목적인 애정과는 구분된다.

또한 어린이 본래의 인간성을 왜곡하는 일없이 어린이다운 감성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른들의 역할은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도와줄 뿐이다. 이러한 교육방식에서도 야마기시즘의 자연과 인위의 조화라는 공동체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끝내고 온 학생들은 밭에서 작물을 가꾸기도 하고 동물을 돌보기도 한다. 놀기를 원하면 놀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하는 등 어느 것을 할 것인지는 각자 자유다. 저녁 시간대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시간을 정한 것이 유일한 규제라면 규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위의 조화, 그리고 평등

이들 공동체는 종교적이거나 체계화된 철학적 이념공동체는 아니다. 이들의 세상은 의외로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자연과 인위의 조화가 깨지고 대신 경쟁과 소유가 지배하는 세상이 불행의 공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순환공생하고 무소유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세상이 진정으로 행복한 이상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산안농장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온 시간은 그 세계를 찾아 나선 길이고 그들의 공동체 생활은 실천 그 자체였다. 이들에게 행복의 이상향은 먼 미래의 시간에 있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