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우금 이란?

먼우금 이란

Bravery-무용- 2017. 7. 4. 17:52

敬次芳草堂韻

雲翁以今趣能成 此一堂中見士生 聞善人來千里近 分書童曬百家明

窓前鳥語催春夢 枕下泉鳴和讀聲 勝日尋芳看竹樂 應傳世世子孫榮

秋齋 金輔林 安東人

 

방초당의 시를 차운함.

 

운옹(주희)이 지금에 뜻을 이루었으니

이 당() 가운데 선비들을 보라.

착한 사람 듣고 오니 천리가 가깝고

공부하는 아이 나누어 볕 쬐니 모든 집이 밝네.

 

창 앞에 새들이 재잘대며 봄 꿈을 재촉하고

베개 아래 샘 소리는 글 읽는 소리와 화합하네.

좋은 날 경개(景槪) 찾고 대나무 보는 즐거움을

마땅히 대대로 자손에게 전하여 영화롭게 하리.

 

*雲翁(운옹) : 호가 운곡노인(雲谷老人)인 주희(朱熹)를 말함.

 

제대로 판독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번역도 최대한 판단해서 해본 것이니 참고로 보십시오. 그런데 대체 방초당이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어디 정자인지, 배경 설명이 있다면 이런 작업이 더 쉽고 정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翰軠]

 

고혈압약 복용 시, 먹어도 되는 과일과 안 되는 과일

오전 기온은 10~17도, 오후는 15~25도.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 비가 내리겠다. 낮에는 황사의 영향으로 대기의 질이 '한때 나쁨' 수준을 보이겠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다시 맑고 화창한 날씨가 찾아올 예정이다.

☞ 오늘의 건강= 우리나라 60대 2명 중 1명은 고혈압 환자다. 성인 기준, 수축기 혈압이 140mmHg 이상이거나 이완기 혈압이 90mmHg 이상이면 고혈압으로 분류된다.

유전적 영향과 체질적 요인 등이 혈압에 영향을 미치는데, 고혈압은 자연적으로 없어지거나 완치되기 어려운 만성질환이기 때문에 꾸준한 약물치료가 필요하다. 방치 시에는 뇌졸중, 심근경색, 심부전 등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고혈압약은 정해진 복용시간에 맞춰 꾸준히 먹어야 한다. 복용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면, 생각난 즉시 먹도록 한다. 단, 다음 복용시간이 더 가깝다면, 그 시간에 맞춰 복용하면 된다.

복용량은 정해진 1회 용량을 지켜 복용해야 하며, 복용시간을 놓쳤다고 임의로 용량을 늘려선 안 된다.

또한, 이뇨제 성분의 고혈압약은 저녁 늦게 먹으면 이뇨작용으로 수면을 방해받을 수 있으니, 아침에 복용하는 편이 좋다.

고혈압약 중 칼슘채널차단제는 부종이나 안면홍조, 안지오텐신전환효소 저해제는 마른기침, 안지오텐신Ⅱ수용체 차단제는 소화불량, 설사, 복통 등이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이 나타날 때는 의사와 상의해 용량을 조절하거나 다른 성분이 든 약으로 변경하도록 한다.

평소에는 건강한 식습관을 통해 염분 섭취를 줄이는 것이 좋다. 김치, 찌개, 국, 젓갈, 라면 등 염분이 많은 음식을 자주 먹으면 고혈압, 심장질환 등이 악화될 수 있다.

또한,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푸로세미드 등 이뇨 작용 방식의 고혈압약은 저칼륨혈증을 유발할 수 있으니, 칼륨이 많이 들어있는 오렌지, 바나나, 건포도 등 과실류나 당근, 시금치 등 녹황색채소 등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암로디핀 등 칼슘채널을 차단하는 성분의 경우 자몽 섭취에 주의가 필요하다. 자몽이나 자몽주스 등이 칼슘채널차단 작용을 증가시켜 부작용이 더 많이 나타날 수 있으니, 약 복용 1시간 전부터 복용 후 2시간까지는 자몽주스를 마시지 않도록 한다.

 

 
 

 

 

 

김경직

 

[ ]

분야 종교/유교,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출처 디지털김천문화대전-김경직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김녕().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한 8대조 김지()로부터 분파된 대사성파의 후손이다. 1429년(세종 11) 덕산마을로 낙향한 입향조 김풍()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김석용()이다. 김석용도 당대의 효자로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하고도 눈이 오면 산소를 찾아 눈을 쓸었고, 아들 김재택도 9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수시로 성묘를 다녀 삼세효()라 칭송받았다.

활동 사항

김경직()은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순후하고 부모의 명을 하늘과 같이 섬기는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부친인 김석용과 함께 대덕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큰 호랑이가 나타나 부친을 공격하자 온몸으로 막았으나 역부족으로 부자가 모두 큰 해를 입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간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마친 후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백일기도를 드린 후 대덕산으로 들어가 곳곳에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마침내 부친을 해친 호랑이를 잡아 껍질을 벗겨 부친 묘소에 고한 후 제를 올렸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경직의 효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덕산마을이 효행의 마을로 알려졌고 지역 유림의 청원으로 마을 어귀에 장릉참봉 김경직 효행비()가 세워졌으며 문중 재실인 상덕재()와 경앙재()에서 매년 향사하고 있다. 덕산리는 김천시에서 추진한 2009년도 ‘보물찾기를 통한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에 공모하여 사업의 주제를 ‘효의 행적을 찾아서’로 정하고 김경직의 효행을 선양하기 위해 효행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김경직의 효행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참고문헌

  • 전호봉, 『금릉지(金陵誌)』(금릉지편찬회, 1963)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 『품천사집(品川史集)』
  • 『금릉군지』(금릉문화원, 1994)
  • 『향토사료지』(김천문화원, 1996)
  • 『김천시사』(김천시, 1999)
  • 인터뷰(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김내환, 남, 49세, 2010. 1)
  • 인터뷰(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후손 김수환, 남, 64세, 2010. 1)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네이버 지식백과] 김경직 [金慶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평수 계산 법 가로X세로=       ㎡X0.3025=      평

17mX8m=136㎡ X 0.3025=41.14평

 

뱀이 싫어하는 약초나무들

.결명자: 결명자가 뱀과 상극이라 뱀의 접근을 막아준다. 2. 녹나무 : 줄기나 잎에서 나는 송진향기가 뱀이나 지네, 개구리 같은 것이 가까이 오면 죽거나 오지 못했다고 한다. 3. 당귀 : 뱀이 많은 집은 당귀를 심으면 뱀이 멀리 간다. 4. 복숭아나무 : 뱀이 싫어한다고 민간에서 알려져 있다. 5. 봉선화 : 뱀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므로 봉숭아를 심으면 뱀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봉숭아를 금사화라고도 부른다. 6. 비수리 : 뱀을 쫓는다고 하여 사퇴초라는 이름도 있다. 7. 산초나무 : 향이 진해 모깃불로 사용했다. 향을 뱀이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8. 앵두나무 : 울안에 1-2그루를 심으면 뱀이 범접을 못한다. 9. 쪽 : 뱀이 싫어하며 독충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10. 창포 : 창포 냄새는 뱀이 싫어해 창포물로 씻으면 뱀이 물지 않는다. 11.기타: 금잔화, 담배, 라벤더, 목초액, 백반, 백합,웅황, 유황, 접시꽃, 휘발유도 싫어한다. 텃밭일.산행시 뱀에 물리지 안도록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추사 김정희

잘 나가던 추사 선생이 멀고도 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시절  유배되기 전에 그렇게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요즘도 그렇지만 잘 나갈 때는 그렇게 시끌벅적  모여들더니 막상 귀양살이를 하니 누구 한 사람 찾아주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추사에게 소식을 전한 이가 있었는데 예전에 중국에 사절로 함께 간 이상적이라는 선비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많은 책을 구입해서 유배지인 제주도까지 부쳤다고 합니다. 극도의 외로움과 어려움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추사에게 그의 우정은 엄청난 위로와 감동을 주고 추사는 둘 사이의 아름답고 절절한 우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고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무도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라고 합니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의 구절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날씨가 차가워지고 난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지만, 날씨가 차가워지는 늦가을이 되면 상록수와 활엽수가 확연히 구분되듯 진정한 친구관계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는 말이죠~

 

늙어서 친구간의 우정은 금쪽같은 존재이고 햇볕과 같다! 우리의 삶을 하루시간에 맞춰보면 지금 몇 시쯤 지나고 있을까? 우리 인생의 시계는 오후 7시쯤 되지 않았을까?

시간을 바라 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매우 빠르고 아쉽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참을 수 없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친구들이 더 생각난다.

가끔 “어느덧 형들을 만난지 40년 여년이 넘었구려! 반평생 서로 형제처럼 산지가 엊그제같은데....”.라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빛바랜 과거의 사진을 보거나 젊은 날을 반추해보면서 옛친구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친구들을 만나도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마지막이라는 생각마저들며 눈물이 앞선다.

사실 요새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음의 천국에서 추방된 노년으로 살아가는 기분이든다. 인간의 존재론적인 조건인 비극과 슬픔, 외로움이 문턱을 슬슬 넘어 오면서 삶의 의미(meaning in life)까지 혼란스러워 진다.

만나는 친구들이 건강을 잃고 화석처럼 변해가는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늙음의 흔적, 삶의 고통을 지울 수가 없다. 친구집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데 친구는 “다리가 성치못해 멀리 배웅 못하네! 잘 가세!”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지난 40여간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혹은 직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지내던 친구들이다. 만나서 말싸움 하다가“당신 지옥 가! 나는 천당 갈게!”하며 농담하던 친구들이었다.

늙어가면서 옛날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의미를아는지?

남다른 다정다감한 친구관계를 유지해 왔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멀어 진다.

그렇다고 천하 만물이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할것이 아니다. 숨어사는군자처럼 집 한 칸을 지키며 살아가는 노인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다.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라. 고통을 이기는 데는 친구가 제일이요,  우정을 지켜가는 삶이 노후의 미덕이다.

우정은 낮은 사망률과 장수사회라는 인생여정에서 사회자본 혹은 문화자본(culture capital)으로 작용한다. 빈번한 상호작용과 정서적으로 가까운 친구가 웰빙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글은 과거로 다시 돌아가 옛 친구를 찾아보며 우정(friendship)을 성찰해보자는것이다. 웰빙 심리로 친구 간 우정관계를 높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친구는 사회적 결합의 파트너이며 서로 조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친구의 아픔은 내아픔처럼 여기며 도움을 주는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  이런 친구가 주는 우정의 힘은 우리들의 삶을 살찌게 한다.

‘평생우정’지키기와 새로운 친구 만들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에서 고품질의 긴밀한 인간관계유지가 필요하다. 바보같이 행동해도 편안한 동료로 맞이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큰 축복이다.

 

1.우정(友情)이란 무언인가?

우정의 논리는 옛날이나 지금도 변함없는 가치다. 플라톤이나 키케로의 담론에서  인간관계의 찬란한 길이 우정이라고 했다.

특히 ‘마커스 키케로’(Cicero)는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On Friendship and Oldage)를 썼다. 이 글은 48,000단어로 쓰여져 있으나 영어권에서는 약 2.900자 내외로 요약되어 각 대학에서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

여기서 그는‘미덕은 우정의 기초다’(Virtue is the foundation of friendship)라고 하면서우정에서는 성실성(sincerity)을 강조하고 있다.

우정은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미래를 희망의 화려한 빛을 주는 것이다. 친구에 대한 친절은 나 자신의 친절에 비례한다고 했다.

또 근대에 들어와서 우정에대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교육자 ‘이반일리치’(Ivan Illich)의 다양한 대화와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있다. 그는 근대 학교교육에서 인공적인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정의 가치를 말한다.

인간 사이의 우정은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스파게티와 포도주를 함께들면서 나오는 우정이 친분을 두텁게 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우정이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키케로의 ‘우정론’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키케로의 ‘우정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틴문학의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그가 말하는 우정이란 같은 곳을 보는 사람끼리 나누는 것, 입장과 생각과 지향점이 같은 거울 같은 친구를 말한다. 친구 간 우정의 가치가 지속되도록 가꿔야 한다.

우정의 토대는 미덕이다. 미덕 없이 우정을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덕이 우정을낳고 지켜주기 때문에 우정을 존속시키는 것이 신뢰다. 우정의 요체는 취향, 목표, 의견의일치를 이루는 것,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만 가능하다.

우정은 신에게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우정은 본질적으로 이익추구가 아닌 사랑에서 비롯된다. 우정은 서로 주고받을 때 더 두터워진다고 했다.

2.노년기에 우정(友情)이 왜 필요(必要)한가?

우리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돈이 많다한들  질병, 전염병 등 죽음에 대한 공포에 줄곧 시달리며 살아 왔다.

노인들의 얼굴 모습에서 스트레스, 욕구불만, 심리적 불안감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안한 자아모습을 보인다. 모든 생명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없는 나이, 삶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비약(飛躍)의 꿈이 없는 듯하다.  나이 듦의 침묵이 계속되면서 “나는 세상에서 존재가치가 없나!” 하는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족 및 가까운 친구들과 더불어 깊은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동기를 만들어야한다. 웃음이 넘치는 소시민적 행복감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정의 나눔이다.

그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친구가 제일이다.  친구는 부모와 상의 할 수 없는 혹은 아내와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우정은 가장 자연적이고 인간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익을 챙기려는 거짓 우정이아니라 변함없는 진정한 우정 말이다. 친구간의 말은 서로를향해 느낌을 교환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른은 임종을 앞두고 아내와 가족을 다 내보내고  절친한 친구만 불러서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우정을 나누는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방식이 좀다르다. 여성들은 우정을 느끼면주로 얼굴을 맞대고 ‘친밀한 수다’를 떤다. 여자들은 가치 중심적 관점에서 나눈다.

주로 가정문제, 사랑 문제를 놓고 대화한다. 여성들은 정신적 일체감을 더 중시한다. 반면에 남자들은 친구들과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헤게모니적 감정이 지배한다.

사회관계에서 직업적 위세에서 대하는 경향이 달라진다.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에서 만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한마디로 노는 물이 같아야 계속 만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여하간 남녀 모두 친구들과의 우정은 신뢰, 사랑, 감정의 나눔이다. 우정을 나누며 즐겁게살지 못하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지만 친구가 없으면 사막과 같은 노후 생활 된다.  햇볕 같은 이야기를 하여도 모자랄 시간에 밤늦도록 대화하는 우정은 평생을 간다.

삶의 질은 당신의 우정과 사랑능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로워도 누군가와우정을 나누며 그리워한다면 그것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살아서 짬짬이 친구들과 만나며 우정을 나누는것이 성공적 노후생활이다. 따라서 노년기에 우정이 왜 필요한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래된 우정(友情)은 당신의 생활(生活)을 더 풍부(豐富)하게 즐거움을 만들어가는‘투자(投資)’이기 때문이다.

우정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습관이 되고, 그리고 삶의 방식이 된다. 우정은 존재들의 결합을 강화시켜 준다는 사실은 다 아는 일, 이때의 주된 결속력은 논리가 아니라 우정이요, 사랑이다.

삶의 기쁨은 사랑으로부터 솟아나오며 아는 주체와 알게 된 객체에대해 동정심 즉 경외로운 책임감과 변화의 기쁨으로 이루어진 결속력으로 묶여지는 것이 친구의 우정이다.

둘째: 사회관계망(社會關係網) 유지(維持)의 필요(必要)에서다.

흔히 “죽음은 삶을 끝내지만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는 끝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사회관계망 규모는 배우자 유무, 자녀와의 동거여부, 가깝게 지내는 친척의 수, 이웃의 수, 친구의 수일 것이다.

이들과의 우정은 당신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자산으로서 죽어서도 후손에 의해 이어지는 관계이다.

셋째: 우정(友情)은 사회적(社會的), 정서적(情緖的) 이익(利益)을 가져오는 웰빙 요소(要素)이기 때문이다.

장수할수록 고독을 피하기 위해서 친구들과의 우정 유지가 필요하다. 친구는 가족만큼 중요한 파트너이다. 가족의 위기가 닥쳤을 때 먼저 친구에게 연락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친구가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미국의 노인들 2/3가 친한 친구를 만들어 즐기고 있는가 하면 각종 모임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며 우정을 쌓아가고있다.

넷째: 좋은 우정(友情)은 당신의 건강(健康)을돕고 외로움과 고립(孤立)을 방지(防止)하며편안(便安)한 삶을 제공(提供)하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것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완화 시킬 수 있다.  친구관계는 사회참여활동기회가 높아지면서 알츠하이머병, 치매를 멀리할 수 있다.

우정은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건강을 확대하고 삶의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결국 우정을 나누는 데는 잘나고 못난 것이 없다. 단지 다를 뿐이어서 우정은 인간관계를 꽃피우게 하는 것, 화려한 립 서비스가 아닌 남들과 잘 어울리며 교감하는 우정이 필요하다.

정말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도 딱 할 말이 없지만 그저 만나서 서로 바라보고  대화만으로 우정을 느끼는 관계 말이다.

친구 한 사람의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 한 사람의 기쁨이 나의기쁨, 멀리 있어도 그리워지는 것이 우정이다. 오늘도 마음속으로 친구를 만나는 것이 노후 생활의 즐거움이다.

3.우정(友情)을 나눌 수 있는 친구(親舊)는 누구인가?

자신에게 우정을 유지해가는 특별한 친구가있는가?누가 당신을 좋아하는가?우정은 친구간에 긴밀한 관계유지 및 존중감에 기초한다고 했다. 특히  노화과정에서 신체적 변화 혹은 은퇴 후에는 우정이 필요하다.

90대 노인이지만 20대와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우정규범(friendship norms)은 신뢰, 충성, 헌신, 관용, 존중, 배려, 애정, 자기공개 및 지원이다. 그러면 당신에게 도움을주는 친구는과연 누구일까?

01.당신의 오랜 친구(親舊)로서 친분관계(親分關係)를 계속(繼續) 유지(維持)해가는 사람이다. 바쁜 생활(生活) 가운데 서도 안부(安否)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관심(關心)을 보이는사람이다.

02.당신은 상대방(相對方)을 잃어버렸지만 계속 당신을 찾는 사람이다. 지인(知人)들이나소셜미디어를 통해 당신을 찾는 사람이 변함없는 친구다.

03.나이를 먹더라도 과거(過去)로부터 현재(現在)에 이르기 까지 옛것을 기억(記憶)하며 다가오는 사람이다. 오랜 친구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멀리 있으면서도 옛친구를 찾아가 만나는 열정(熱情)을 보인다.

04.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당신의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 해오는 사람이다. 고급와인처럼 옛친구는 나이와 관계없이 또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진짜 친구의 우정이다.

결국 우정은 큰 것이아니라 작은 관심이다. 우정은 상호간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하는 것, 자기가치의 감각을 향상시킬 수 있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다.

따라서 친구 한 사람을 갖는것은 사회적 투자와 같은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생명이 5분도 안 남았다고 할 때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이를 헤아려 보라.

4.노인(老人)의 우정(友情)은 어떻게 변(變)하게 되는가?

친구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즐길 수있는 사람들로 여가활동에 참여하거나 매일 혹은 자주접촉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구가 많으면 사기도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친구는 가족 친척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 아는 바이다. 공유가치로서의 관심, 신뢰, 애정의 표시 및 상호지원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필요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절친해도 모든 인연은 변하기마련이다. 서로 사랑하는 깊은 우정도 완만하게 상호간 파괴가 시작되면서 우정이 깨지기 시작하다.

친구간이지만 한 쪽이 까다로움과 무례함, 화내는 일이 자주생기면 깊어가던 우정도 저버리게 된다. 말인즉 친구와의 우정관계도 점차 변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01.우정(友情)은 퇴직연령(退職年齡)에 따른 다른 생활(生活)로 이어지면서 변한다.

02.노인(老人)에게 주어지는 시간활용(時間活用)의 차이(差異)로 인해 달라진다.

03.친구(親舊) 및 가족(家族)들의 사망(死亡)혹은 이혼(離婚)으로 인한 변화(變化)이다.

04.건강정도(健康程度)에 따라 다르다. 건강이 나빠지면 만남의 관계도 소홀(疏忽)해 진다.

05.경제생활(經濟生活) 차이(差異)에 따라 변한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행동(行動)이  제약(制約)된다.

06.기대가치(期待價値)의 차이로 만남의 관계가 소원(疎遠)해진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줄어들면서 선택적으로 몇 안되는 적은 수의 친구들과만 만나게 된다. 연령효과(age effects)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또래의 친구끼리 노는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개인의 규범적 기대치도 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사람과 싫어지는 사람이 생기면서 친분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마음이 내향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에 대해 등을 돌린다. 노는 물이같아야 편하다는 느낌이 작용하면서 노년후기에는 대개 6-8명으로 압축해 우정을 이어가게 된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우정을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우정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과 환경에 따라 자연적으로 맺어진다.

우정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생의 마지막 때를 확실하게 측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친구의 우정을 유지하는 일은 장수의 비결이다.

우정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만나지만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과의 우정 유지는  행복요소로 작용한다.

자기 생활에 대한 열린 자세, 사교성, 조건없는 지원, 함께 즐기는 것, 신뢰유지,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할 때 절친한 친구로서 우정이 유지될 수 있다.

늙어서 만남과 이별을 연거푸 겪으면서도 현재 위치에서 굳건히 자신의 삶을 엮어나가는 자세가 노후의 우정관계를 유지해 가는 일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나 실수에도 그냥 웃고 넘어 갈수 있는 관대함, 그것이 노인으로서 우정을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다.<우 정 著>

 

 

 

내일이면 종심(從心)의 나이로 접어 드는데 봉사하는 직책의 장을 맡았다니 대단한 열정이네. 자네와 근 30년 이상이 소원했었지만 공직 생활을 하였던 자네에게 좋은 일이 있을때 마다 송무백열(松茂柏悅)했었다네. 모쪼록 건강이 제일이네.

 

왜요 18.08.13. 21:46

덕산리 전체가 김무용 정미영님, 귀하신 분들 오셨다고 몹시 반기리라 믿습니다.
새 터전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왜요 18.08.13. 21:41
많이 멀지만 이웃이신듯 공감이 많이 갑니다.
경치가 장난이 아니네요,
옆에 작은 자투리땅 하나 당장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산과 같이 18.08.14. 12:10
격려에 감사 드립니다.
먼 곳에서 왔다고 마을 분들께서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주이(수원) 18.08.13. 21:43
마음에 드는 터에 자리하신 산과같이님.벌써 그곳 풍경속에 하나. 되신듯 행복한 전원일기를 쓰셨네요.
늘 기쁘고 여유롭고 편안하시길 바랍니다.글을 읽으며 그곳 풍경을 저도 그려봅니다
  산과 같이 18.08.14. 12:12
느리게 일하며 육체 노동의 기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정가네(김천) 18.08.13. 22:28
많이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김천시민이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누가 뭐라든 산과같이 님 마음에 흡족하면 모든 게 다 흡족한 겁니다.
저녁 노을이 곱게 지는 아주 멋진 곳에 터를 잡으셨네요.
우리집에서 아주 멀리 초점산과 대덕산이 보이는 데 그곳에 자리를 잡으셨네요.
휴락산방에서 두 분의 삶이 지금처럼 늘 행복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가까운 시일에 아내과 같이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덕산리 몇 번지인지요? 저한테 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산과 같이 18.08.14. 12:15
찾아 인사 드리겠습니다.
카페 "바람재 들꽃" 늘 좋은 글을 만나 감사 드립니다. ^^
 
 섬백리향(성주) 18.08.14. 09:12
마음에 드시는 곳에 안착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산과 같이 18.08.14. 12:16
풍경에 폭 빠졌습니다. ^^
감사 합니다.
 
 풍접초 18.08.14. 10:00
부러울따름입니다.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산과 같이 18.08.14. 12:17
감사 합니다.
즐겁게 살겠습니다.
 
 별꽃(김천) 18.08.14. 13:02
우와~~~
멋진 분이 김천으로 귀촌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어디선가 향긋한 내음이 퐁퐁퐁 납니다.
그곳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자세히 읊어주셔서 눈에 선합니다.
글을 읽고 사진을 보니 딱 제가 그린 풍경과도 일치하네요.
조만간 찾아뵙는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해주세요.
여기는 대항면 직지사 근처 기날마을입니다. 오버!
  산과 같이 18.08.14. 20:06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뷰에 홀딱 반했습니다.
귀촌 한 달, 마을 주민들의 따뜻함에 느낌이 좋습니다.
지지난 주 직지사 음식촌에서 한정식 맛있게 먹어 단골로 점 찍었습니다.
 
 젬마 18.08.14. 15:55
인천을 떠나신 일이 없으셨던
형제님과 자매님의 용기가 대단하십니다
공소의 신부님께서 축복도 주셨으니
완전 대덕산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노을,구름 멋들어진 풍경들이
매일 다를텐데 가끔씩 보여주세요
축하드립니다
부럽습니다
  산과 같이 18.08.14. 20:07
신부님 축복에 힘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목련 18.08.14. 22:36
긴 글 아주 맛있게 읽었습니다
덕산리가 복받았습니다
마을에 좋은분이 오신다는게 복받은 동네지요 ?
덕산리 가보고싶은 동네입니다
부디 두분 귀촌하셔서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사진을 보니까 정말
아늑하고 좋은 곳 같습니다
  산과 같이 18.08.15. 14:38 new
감사 합니다 ^^
한 달 생활에 마을 인심이 좋다는걸 느꼈습니다.
무주에서 덕산재 고개를 넘으면 김천, 첫 동네입니다.
 
 나 영(서울) 18.08.15. 13:48 new
휴락산방 일기
산문 한 편 읽은 것 같습니다.
느리게, 적당히 노동하며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며 사실 것 같아
멋지고 부럽습니다.
여여하시리라 생각듭니다.^^
지금 점심 먹고 나니 졸음이 살짝 찾아드니
산과같이 님 휴락산방이면 다만 10분이라도
꿀잠 잘 듯 싶습니다.^^
 산과 같이 18.08.15. 14:41 new
감사 합니다.
답글을 올리는 이 시간. 2층 바라보는 풍경은
하늘 높게는 뭉게 구름이 멀리는 가야산이 보이는 풍경입니다.

 

 

new
귀촌, 가장 부러운 단어이지요.
이웃분들이 환대를 하셨다는 것을 보니
두분은 좋으신 분들이지시네여. 귀촌은 현지에 사시던 분들과의 좋은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 또 기다립니다^^
  산과 같이 19:58 new
감사합니다.
마을 분들이 넉넉하신 분들이지요.
마을회관에도 자주 놀려오고 정자에도 자주 놀러 오라고 합니다.
아직 정라를 다 못하여 가끔 들려 인사 드립니다.
 
 콜라맘 15:38 new
귀촌
우리의 로망 인데 실현을 하셨군요
마을분들이 농산물을 들고 오신다는걸보니 두분이 귀한 분들인가 봅니다
요즘 농촌에서도ㅈ텃세가 심하다던데 두분은 좋은 이웃으로 자리매김 하셨군요
글이 수필 한편 읽은듯 기분 좋습니다
내내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가 귀한게 아니라 마을 분들의 후한 인심이지요.
며칠 전에는 쪽파 종자도 주셔 우리 텃밭에 처음 심은 농작물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며 같이
행복합니다.
은혜 아래 늘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자연이 아름다워서 시골살이의 어려움을 이기는 큰 기쁨이 되시겠네요.
축하합니다~~~^^

  산과 같이 18.08.17. 20:26
감사합니다.
맞아요 은혜를 받았지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렵니다.
큰 기쁨이 있는 시골생활을 하겠습니다. ^^
 
 파란하늘꿈 18.08.17. 09:59
귀촌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평안과 행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참 멋진곳입니다.
  산과 같이 18.08.17. 20:28
감사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넉넉한 마을 인심에 행복한 귀촌 생활을 하겠습니다. ^^
 
  낭개(수원) 18.08.19. 23:43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아 구름도, 노을도, 새소리도 모두가 신기하고 놀라운 행복.
마치 첫사랑에 흠뻑 빠진 것 같아,
글을 읽는 사람도 두근 거리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
맞습니다. 첫사랑에 빠진듯 덕산리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서둘지 말자 느리게 하자 구호를 외치듯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접경을 이룬 대덕면은 김천의 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수도산, 월매산, 대덕산, 국사봉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며 덕산천과 감주천이 대덕천으로 합류한다.
신라시대에는 지품천현에 속했다가 757년(경덕왕16년) 개령군 지례현에 속하고 1018년(고려 헌종9년)에 성주 경산부로 이속됐다가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1895년 상남, 하남, 외남 등 세 면으로 분동됐으며 1914년 세 면을 합해 대덕면으로 개칭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덕면은 삼도의 접경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는데 특히 우두령은 임진왜란과 무신란, 동학농민항쟁, 6·25전쟁 등 역사의 고비 때마다 호국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지례현 상남면으로 속했던 관기리(館基里)는 1914년 인근의 장곡, 호미와 아랫장터, 웃장터를 합해 관기리라 했고 1960년 관터와 웃장터가 관기1리로 분동했다.
관기(館基)라는 지명은 관기2리 장곡마을에 조선시대까지 장곡역(長谷驛)이 위치하고 있는데다 관사로 이용되던 두의곡원(頭衣谷院)이 있어 관터라 불렸고 한자로 객사관(館)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관기(館基)라 했다.
원래의 두의곡원은 관터마을회관 인근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관터라는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또 대덕지서에서 대덕중학교 사이에 시장이 열려 장터로 불렸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하천이 범람해 매몰된 후 시장이 지금의 면소재지인 관기2리로 옮기고 원래 장이 있던 마을을 웃장터, 뒤에 장을 옮긴 마을을 아랫장터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시장과 면사무소 이전을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대립할 때 주민간 줄다리기를 해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덕면소재지인 관기2리는 장곡과 아랫장터 두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고려시대까지 마을에 두의곡역(頭衣谷驛)이 있어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으로 불리다 조선시대에 들어 역 이름을 장곡역(長谷驛)으로 고치면서 마을이름도 장곡으로 바뀌고 지례현 남면 관할로 속하게 됐다.
1914년 인근의 관터, 호미마을과 합해져 관기(館基)로 했다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관터 일대의 장터가 유실돼 아랫장터로 시장을 옮기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됐고 1960년 장곡과 아랫장터가 관기2리로 분동됐다.
아랫장터로부터 대덕초등학교 방향으로 안쪽에 자리잡은 장곡마을은 마을뒷산인 송시봉(송수봉) 골짜기가 워낙 깊어 긴장(長)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장곡(長谷)이라 했는데 골짜기의 지명이 역과 마을의 지명이 됐다.
장곡마을 아래 국도 3호선 변에 위치한 아랫장터는 대덕면 소재지로 1930년대까지만 해도 길손들을 상대하던 주막이 몇 채 있을 뿐이었으나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관터에 딸린 장터가 매몰되자 주막일대에 5일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뒤에 국도와 무주방면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일약 면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60년 관기3리로 분동된 호미마을은 마을뒷산이 호랑이가 길게 누워있는 와호형(臥虎形)이라 호미산(虎尾山)이라 불렀는데 마을이 호랑이 꼬리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호랑이호(虎)자에 꼬리미(尾)자를 써서 호미(虎尾)라 했다.
이 마을에는 호미금계(虎尾禁鷄) ‘호미마을에는 닭을 금한다’라는 규칙이 불문율(不文律)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에서 낮을 상징하는 닭 울음소리가 나면 새벽이 온 줄 알고 밤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도망을 가기 때문에 마을의 운세가 쇠퇴하므로 닭을 기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던 중산마을은 1914년 이웃한 다화마을과 합해 중산리(中山里)라 했다가 1949년 대덕면으로 편입되고 1960년 중산을 중산1리로 분동했다.
국도변에 자리한 중산마을은 조선 세조 때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한 서산정씨 정사용(鄭士鎔)이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서산정씨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 입구에는 수십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중산숲이 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마을 뒷산이 무너지면서 함께 떠내려 온 토사와 어린나무들이 성장해 형성된 숲이다.
중산에서 관기리로 가는 구(舊) 도로변의 속칭 박바우모티이에는 박몽열과 부인 문화류를 기리는 충렬각(忠烈閣)이 있다.
박몽열(朴夢說 1555~1597)은 밀양박씨로 황간현감 재임 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 개령, 상주에서 의병을 조직해 항거했고 진주성으로 달려가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한 다화(다부실) 마을은 1895년 지례현 하남면, 1914년 김천군 대덕면, 1949년 금릉군 대덕면 증산리에 속했다가 1960년 중산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은진송씨와 이천서씨 후손들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은진송씨와 이천서씨가 집성을 이뤘고 김해김씨도 크게 번성했다.
다부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큰 부자가 많이 나오라는 뜻을 담아 많을다(多)자에 넉넉할부(富)자를 써서 다부실(多富室)이라 했다 하고 다화는 마을 뒷산의 형세가 한자로 마음심(心)자를 닮아 꽂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라는 뜻으로 많을다(多)에 꽂화(花)자를 써서 다화(多花)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입구의 대덕천변에는 김해김씨 김만억(金萬億)의 처 성산이씨 부인의 효열비가 섰는데 부인은 1830년 시댁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가던 중 날아가는 꿩을 보고 시부모님이 꿩고기를 좋아함에도 이제는 드리지 못함을 원통해하며 통곡을 하자 꿩이 품속으로 날아들어 발걸음을 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이천서씨 가문의 서즐은 고려가 망하자 고향 지례로 낙향해 절개를 지킨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의 제자로 스승이 졸하자 윤은보와 함께 3년을 시묘하며 부모의 예로써 정성을 다해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행적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어 효의 모범으로 삼게 했다.
서즐의 묘소는 마을 뒷산인 양지말 무시밭골에 있다.
마을 안쪽으로는 화계정사(華溪精舍)가 산비탈에 있는데 은진송씨 남촌(南村) 송천상(宋天祥 1556~1626)을 모신 사당이다. 송천상은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지례향교가 화염에 휩싸이자 공자(부자) 영정과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모셔내어 화를 면하게 했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1860년(철종 11년)에 지역 유림에서 편히 제사드릴 곳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화계정사를 세웠다. 

 
 
 
 
 
 


가례리(加禮里)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해 가례, 천곡, 석정 등 크게 세 마을이었는데 1895년 남면이 나뉘면서 하남면으로 속하게 되고 1914년 인근의 덕봉을 합해 대덕면으로 편입됐다.
가례마을은 거창신씨(居昌愼氏) 신형만(愼亨萬)이 이주해 살면서 거창신씨 집성촌을 형성했는데 뒤에 동래정씨와 연안이씨가 이거했다.
가례라는 마을의 지명은 거창신씨 가문이 뿌리를 내리면서 후손들에게 항상 예절을 중시하라 해서 더할가(加)자에 예절예(禮)자를 써서 가례(加禮)라 했다고 알려진다.
원래의 가례마을은 마을 뒤에 있는 큰가래골에 있었는데 마을에 흉흉한 일이 자주 일어나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연이 전설로 내려온다.
옛날 가례마을의 한 부잣집에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는데 주인이 인색해 스님을 심하게 박대했다.
이에 스님이 떠나면서 마을 앞 가마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를 깨어버리면 마을에 부자와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부자는 주민을 동원해 가마바위를 깨뜨렸는데 그 순간 바위 속에서 학이 나와 지금의 중산마을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가례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속출했고 결국 지금의 자리로 마을을 옮겼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깨뜨리던 바위가 지금의 큰가래골 입구에 있는 가마바위라고 전해진다.
인근 석정에는 조선 중엽 영남사림의 지도자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들러 학문을 강론하고 갔음을 기념하는 한강선생장루지대비(寒岡先生杖屢之台碑)가 섰고 뒤로는 제자들이 세웠다는 석곡서당(石谷書堂)이 있다.
    
섬계서원과 봉곡사로 유명한 조룡리

 
 
↑↑ 섬계서원 내 천연기념물 300호 은행나무
ⓒ 김천신문
 


조룡리(釣龍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조룡(釣龍), 쌍괴(雙槐), 양지(陽地) 등 세 마을로 이뤄졌었는데 1914년 인근의 봉곡, 조현을 합해 조룡리로 대덕면이 됐다가 1960년 원조룡 등 다섯 마을이 조룡1리로 분동했다.
섬실, 섬계(剡溪)로 불려지는 조룡1리는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를 주도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인 17세 김경욱(金慶郁)이 영동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김녕김씨 충의공파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조룡골은 원조룡(元釣龍)으로도 불리는데 김녕김씨 일가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마을 앞 봉곡천에 옛날 용을 낚았다는 용구(龍口)라는 웅덩이가 있어 낚을조(釣)자에 용용(龍)자를 써서 조룡(釣龍)이라 했다고 한다.
양지마에는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金玄錫) 부자를 주향하고 지례현 출신 유학자 장지도, 윤은보, 서즐을 종향하고 있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데 1802년(순조2년)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고 1899년 복원됐다. 서원 뒤뜰의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을 자랑하며 천연기념물 300호로 지정됐다.
맞은편 음지마을 뒷골짜기는 머릿골로 불리는데 옛날 어느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더니 7일 만에 아이가 벽을 기어오르는 등 회괴한 일이 생기자 부모는 아이가 장차 큰일을 저지를까 걱정돼 죽여 버렸다. 다음날 말 한 마리가 찾아와 아이의 시신을 보곤 슬피 울면서 시신을 물고가다 머리를 이 골짜기에 묻어주고 갔다 해서 머릿골로 불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조현(鳥峴), 봉곡(鳳谷)으로 불렸던 조룡2리는 웃새재, 아랫새재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1895년 남면이 삼분될 때 하남면으로 딸리고 1914년 인근의 조룡, 음지마, 양지마가 통합돼 대덕면 조룡리로 속하게 되고 1960년 아랫새재, 윗새재가 조룡2리로 분동됐다.
마을로 오르는 길옆으로는 첨망대(瞻望坮)라 새긴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가 놓여있고 남평문씨 재실인 감모재(感慕齋)가 조룡천을 굽어보고 섰다.
새재라고 하는 마을지명은 무풍면 금평리로 넘어다니던 고개인 속칭 서낭등재가 지대가 높아 새가 넘나드는 고개란 뜻으로 새조(鳥)자에 재현(峴)자를 써서 조현(鳥峴)이라 적고 새재라 했다.
나눠져 있는 마을 중 아랫마을을 아랫새재라 하고 한자로 하조현(下鳥峴), 윗마을을 윗새재로 부르고 상조현(上鳥峴)이라 했다.
특히 윗새재는 봉곡(鳳谷)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마을입구에 봉곡사라는 절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다.
    
자연휴양림이 있는 추량리

 
 
↑↑ 추량리 은행나무
ⓒ 김천신문
 


추량리(秋良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 추량(秋良) 또는 추장(秋長)으로 불렸다. 1895년 남면이 삼분 될 때 하남면으로 속하고 1914년 가래실, 솔밭골, 주막담, 지푸이를 통합해 추량리로 바뀌어 대덕면으로 편입됐으며 1960년 추량1리와 2리로 분동됐다.
추량1리는 가래실이라고 불리는데 아랫담, 웃담, 양지담 등 셋으로 나뉜 마을의 형상이 떡가래처럼 생겨 가래실이라 했다 한다. 또 서산정씨와 성산배씨 집안에서 가문의 예법을 중시하라는 의미로 가례(家禮) 또는 가례(嘉禮)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1500년대 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한 서산정씨 11세손 행촌(杏村) 정처우(鄭處祐)가 충남 서산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서산정씨 집성촌을 형성해 왔는데 정처우는 은행나무를 좋아해 호를 은행나무행(杏)자를 써서 행촌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중앙에는 처음 마을을 개척할 때 심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마을의 자랑으로 서있는데 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됐다.
1960년 분동된 추량2리는 솔밭골, 주막담, 지푸이 세 마을로 이뤄졌는데 가래실로부터 증산면 방향의 가릇재로 향하는 도로변 좌우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솔밭골은 한자로 송전(松田)으로 적는데 지세필(池世泌)이 처음 들어와 살면서 마을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해 솔밭골이라 했다고 한다.
가릇재 입구에는 지푸이, 황성(黃城)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가릇재 아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깊다’는 의미의 사투리인 ‘지푸이’라는 동명을 얻었다. 가을이면 마을주변의 계곡과 산이 단풍에 쌓여 노란 성에 둘러싸인 것과 같아 누를황(黃)자에 성성(城)자를 써서 황성(黃城)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로는 증산면으로 넘어가는 가릇재가 있고 그 직전 골짜기에 새롭게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는 수도산자연휴양림이 생겨 전국의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쌍호정으로 유명한 연화리

 
 
↑↑ 쌍호정
ⓒ 김천신문
 


연화1리로 속한 연화실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는데 1895년 남면이 나뉠 때 상남면이 되고 1914년 소태실과 합하여 연화리(蓮花里)가 됐다가 1960년 연화1리로 분동됐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으로 재임하다 전사한 쌍호(雙湖) 장홍한(張鴻翰)의 처(妻) 연안이씨 부인이 아들 장귀동(張貴東)을 업고 친정과 가까운 이 마을에 정착한 후 대대로 인동장씨 판관공파 집성촌을 형성해오고 있다.
마을 앞 덕산천변에는 인동장씨 후손들이 선조인 장홍한을 기리기 위해 1954년 건립한 쌍호정(雙湖亭)과 쌍호장선생유허비(雙湖張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있다.
연화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연밥연(蓮)자에 꽃화(花)자를 써서 연화(蓮花)라 하고 연화실, 여내실 등으로 불렸다.
연화실마을과 이웃한 연화2리 소태실은 임진왜란 때 안동김씨 김응보(金應)가 피난을 와서 형성한 마을이다.
소태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어느 왕자의 태(胎)를 마을 굴밧골 뒷산에 안치했다 해서 태실(胎室)이라 하고 그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했는데 뒤에 왕자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자 ‘예전의 태실’이라는 의미의 소태실(小胎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소태(小台)로 바뀌었다.
    
대덕산 아래 첫 마을 덕산리

 
 
↑↑ 김경직 효행비
ⓒ 김천신문
 


덕산과 옴배미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하다 1895년 상남면, 1914년 덕산과 주치가 합해져 대덕면 덕산리(德山里)라 했다가 1960년 덕산1리와 2리로 분동됐다.
덕산마을은 김념김씨 집성촌으로 김숙연(金淑蓮)이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난 후 연좌를 피해 구성면 상거에 은거해 있다가 후손 김풍(金豊)이 덕산으로 이거한 후 대대로 김녕김씨 대사공파(大司公派)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덕산(德山)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대덕산(大德山)이라는 큰 산이 있어 얻은 것으로 전해지며 일설에 이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덕을 쌓고 살자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을입구 조산걸에는 장릉참봉김녕김공휘경직효행비(莊陵參奉金寧金公諱直孝行碑)가 있는데 김경직(金慶直)은 부친 김석용과 함께 대덕산에 싸리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것을 추격해 부친의 시신을 찾아왔다고 한다. 장례를 마친 후 원수를 갚기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고 대덕산 곳곳에 함정을 파 호랑이를 잡았는데 세 번째 잡은 호랑이가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경직은 호랑이를 부친 묘소에 바치고 제를 올리며 원수를 갚았음을 고했는데 지역유림에서 효행비를 세우고 나라에서 장릉참봉 벼슬을 제수했다.
마을 입구로부터 도로변에는 상덕재(尙德齋), 경앙재(景仰齋) 등 유서 깊은 재실이 즐비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덕산마을 아래에 자리한 덕산2리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 정착한 수원백씨 일가들이 마을을 개척한 이래 옴배미, 주치(走峙) 등으로 불리며 덕산천을 중심으로 양지말, 건너말, 안마을로 나눠져있다.
옴배미라는 지명은 마을이 대덕산과 주치령, 국사봉에 둘러싸여 유난히 포근해 따뜻할온(溫)자에 일정한 면적의 땅을 뜻하는 사투리인 ‘배미’와 합해 온배미라 한 것이다.
    
감주골 두 마을 외감리와 내감리
외감리(外甘里)는 감주골 입구로부터 외감, 절골(사곡), 진터(중감), 내감(웃감주)마을인데 감주는 원래 골이 깊은 계곡이라 해서 산깊을감(嵌)자에 시내계(溪)자를 써서 감계(嵌溪)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달감(甘)자에 고을 주(州)자를 써서 감주(甘州)로 바뀌었다.
이같은 사연은 내감리(內甘里)의 중감마을이 군사 요충지로 군진(軍陣)이 주둔했던 병영마을로 지금도 진터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병영에서 쌀 씻는 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면 물색깔이 희게 변하고 쌀뜨물이 진해 물맛이 달았다 해서 쌀뜨물감(泔)자에 고을주(州)자를 써서 감주(泔州)라 했다고도 한다.
외감(外甘)은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고 1895년 남면이 삼분될 때 상남면으로 되고 1914년 대덕면으로 개칭할 때 인근의 절골을 합해 외감리라 했다.
연화리로부터 감주골로 들어오는 목이 좁다란 송골을 지나면 골 깊은 감주골이 시작되는데 ‘좁다’의 사투리인 ‘솔다’는 뜻으로 좁은 골, 송골이라 했다.
송골을 지나면 감주천 너머로 유명한 아흔 아홉다랑이논이 있다. 논 한마지기가 아흔아홉다랑이로 이뤄질 만치 경작지가 협소하다는 것인데 모를 다 심고 나서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드니 삿갓 아래에 한 다랑이가 더 남았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외감마을은 감주골짜기에서 가장 아래, 바깥에 위치해 아랫감주, 외감(外甘)이라 불리게 됐고 그 안쪽의 절골은 마을 뒤 대덕산자락에 옛날 큰 절이 있어 절골, 사곡(寺谷)이라 했다.
절골 안쪽으로는 내감리로 속하는 진터와 웃감주마을(내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진터는 외감과 내감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중감(中甘)이라고도 하며 군진(軍陣)이 위치해 진터로도 불린다.
진터 앞산은 국영말달리기봉 또는 장군봉으로도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자신의 오판으로 군진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결한 송국영 장군의 묘가 있음으로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매화낙지형의 명당 터 화전리
화전리(花田里)는 조선시대에 지례현 남면으로 속해 화전, 외산, 내산 세 마을이었는데 1914년 인근의 월매, 텃골과 합하고 대덕면으로 이속시켰다.
화전(花田)마을은 꽃밭으로도 불린다. 마을자리가 매화낙지(梅花落地) 즉,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로 알려져 꽃밭, 화전(花田)이라 했다는 것인데 마을앞산의 이름이 월매산(月梅山)이다.
마을회관 옆에는 연안이씨 문중에서 선조 이기태(李基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첨모재(瞻慕齋)가 있다.
꽃밭마을 인근의 내산과 외산마을은 산 하나를 사이로 안쪽에 있다 해서 안산(內山), 산 밖에 있다 해서 외산(外山)이라 했는데 내산은 산을 넘어와서 마을의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넘터골로도 불리는 장수황씨 집성촌이다.
외산마을 앞 국도변의 도로가 크게 휘어진 부분은 박선달모팅이라는 재미있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옛날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던 밀양박씨 한 선비가 이곳에 조상의 산소를  들인 후 과거에 급제했다 해서 박선달모팅이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화전2리로 속하는 달매와 텃골은 월매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텃골은 고려중엽에 화순최씨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터기(基)자에 마을동(洞)자를 써서 기동(基洞)이라 적고 터골, 텃골이라 했다.
마을뒷산인 매화산 자락 절골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됐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됐다는 매화사(梅花寺) 터가 아직 남아있으며 마을입구에 효자의성김공명진지비(孝子義城金公鳴振之碑)와 열부청도김씨지비(烈婦靑道金氏之碑)가 나란히 서서 이 마을이 유서 깊은 마을임을 대변해 주고 있다.
    
경상남북도 도계에 걸쳐있는 문의리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문의리(文義里)는 기린마, 임터, 꼭두바위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문의, 임기 등으로 불리다가 1895년 외남면, 1914년 인근의 꼭두바위, 아랫임기를 합해 문의리(文義里)로 지명을 바꿔 대덕면으로 편입됐다.
국도 3호선 변에 위치한 임터는 문의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을 개척할 당시 나무가 울창해 수풀임(林)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임기(林基)라 적고 임터라 했다.
임터 아래에 아랫임터로 불리는 마을이 새목골과 화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로는 마을 앞에 굽은 바위가 놓여있어 굽을곡(曲)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곡암(曲岩)이라 적고 꼭두바위라 했다는 곡암마을이 도로변에 남아있다.
곡암마을은 수년 전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 도로 직선공사로 두 동강이 나면서 형태가 많이 훼손됐고 마을의 지명이 유래됐다는 꼭두바위도 수해 때 떠내려가고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임터에서 우측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길을 한참 들어가면 원문의, 내촌, 기림마로 불리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오지였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집성촌이다. 국사봉으로 오르는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내촌(內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원래의 문의마을’이란 뜻의 원문의(元文義)로도 불린다.
문의라는 지명은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등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사봉 아래로 깊숙이 들어와 살면서 학문을 뜻하는 문(文)자와 지조를 상징하는 의(義)자를 따서 마을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기린마라는 지명은 ‘건너편에 마을’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전한다.
    
우두령과 감천발원지가 있는 대리

 
 
↑↑ 우두령
ⓒ 김천신문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경계를 이루는 대리(坮里)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하다 1914년 예서, 대동, 새목골, 덕석마가 통합돼 대리라 했다가 1949년 대덕면에 편입됐으며 1960년 골담과 예서동이 대1리, 안마가 대2리로 분동했다.
거창군 웅양면으로 연결되는 배터재 아래 자리 잡은 골담마을은 새로 국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꾸불꾸불한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굽을곡(曲)자에 마을촌(村)자를 써서 곡담(曲村)으로 적고 골담이라고 불렀다.
골담 위 배터재 고갯마루의 경계지점에는 예서동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서동(餘瑞洞)이라 했는데 지금은 예서동(禮瑞洞), 예서목으로 불리며 마을 뒤 문의리 기림마 방향으로 성터가 있다 해서 예성(禮城)으로도 불린다.
또 옛 국도였던 우두령으로 향하는 비포장로를 따라 가다보면 우두령 정상 아래에 잘생긴 큰 바위가 있고 덕석(德石), 덕석마로 불린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동이 되고 마을의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골담과 덕석마 사이의 원터들에는 옛날 소지원(所旨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어 험한 우두령을 넘나드는 길손들의 쉼터가 됐다.
경남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우두령은 일대의 지형이 소머리를 닮았다고 소우(牛)자에 머리두(頭), 재령(嶺)자를 써서 우두령(牛頭嶺) 또는 소머리재로 불린다.
우두령은 1978년 국도가 새로 개설되기 전까지 국도 3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지금은 거의 차량이 다니지 않는 잊혀진 고갯길이 되고 말았다.
우두령은 경상남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로 일컬어졌는데 임진왜란과 이인좌의 난, 동학난,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골담마을 맞은편의 안마는 대2리로 속하는데 1450년 합천이씨 일가들이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 마을이 자리한 위치가 높아 대대(坮)자를 써서 대동(坮洞)이라 했는데 뒤에 약자로 대동(台洞)으로도 적었다. 또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죽동(竹洞), 댓골, 대동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두령 정상에서 우측으로 봉화산을 오르다 보면 감천 170리가 시작되는 봉화산 감천발원샘이 있다. 1999년부터 매년 가을 감천발원제를 지내고 있다.

 
 
↑↑ 감천발원지
ⓒ 김천신문
 


    
□대덕면의 문화유산
    
섬계서원

 
 
↑↑ 섬계서원
ⓒ 김천신문
 


대덕면 조룡리에 소재한 섬계서원(剡溪書院)은 1802년(순조2년) 김녕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는데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1914년 경의재(景毅齋), 1961년 세충사, 1996년 동별묘를 다시 세웠다. 세충사(世忠祀)에는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주벽으로 하고 맏아들로 연좌돼 함께 순절한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고 있다. 김문기는 충청도 옥천태생으로 형조,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56년(세조2년) 이조판서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하고 1731년(영조7) 복관됐다. 또 동별묘(東別廟)에는 지례 출신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와 제자인 윤은보(尹殷保), 서즐(徐騭)을 종향하고 있다. 서즐과 윤은보는 1434년(세종16년)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恩報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행적이 실렸는데 자손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부모의 예로서 효행을 다한 대효자로 이름이 났다.
    
봉곡사

 
 
↑↑ 봉곡사 대웅전
ⓒ 김천신문
 


1698년 영휴대사(靈休大師)가 쓴 봉곡사중수사적비명에 따르면 봉곡사(鳳谷寺)는 664년(신라 선덕여왕 14년)자장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중수한 것으로 나타난다. 봉곡사의 사세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700년대 초로 당시 18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1717년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된 후 사세가 급격히 위축됐다. 대웅전은 1707년(숙종 33년)과 1916년 중수하고 명부전은 1690년(숙종16년)과 1908년 중수가 이뤄졌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 동상실, 일주문, 요사체 3동이 있는데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은 200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로 지정됐다.
    
□대덕면의 산
    
대덕산
김천시 대덕면과 무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대덕산(大德山)은 해발 1,290m로 다락산 또는 투구봉으로도 불린다.
다락은 높다는 의미이며 투구는 산 정상의 생김새가 장군이 머리에 쓰는 투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악산, 금오산과 함께 김천을 상징하는 삼산이수의 하나이며 산의 생김새가 험하지 않아 덕성을 지닌 산이란 뜻으로 ‘대덕(大德)’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다.
    
□대덕면의 특산물
    
오이, 고랭지 감자 특히 유명 

대덕면 특산물 중 으뜸은 오이와 고랭지 감자. 품질은 물론 맛이 뛰어나 전국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으며 주생산지에 비해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양파와 사과 또한 알아준다.
오이는 63농가가 22ha에서 840톤을 생산하고 감자는 285농가가 33ha에서 830톤을 생산해 대산농협 유통센터 등을 통해 출하하고 있으며 양파는 145농가가 117ha에서 4천200톤, 사과는 39농가가 25ha에서 325톤을 생산하고 있다.
    
□대덕면의 산업체
    
자연 속 살아 숨쉬는 대덕벽돌

 
 
↑↑ 대덕벽돌
ⓒ 김천신문
 


대덕면 가례리 831-11번지에 위치한 대덕벽돌은 토목 건축 관련 모든 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업체이다.
1985년 대덕블록으로 설립돼 콘크리트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생산하다 1995년 전자동 유압성형기를 도입하고 그 이듬해 대덕벽돌로 상호를 변경하는 한편 대표자를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으며 1997년과 1999년 2개의 KS인증을 받았다. 콘크리트벽돌(허가번호 제97-001-063호)과 속빈콘크리트블록(허가번호 제98-09-048호) KS인증을 받은 것이다.
“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대덕벽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기업 대덕벽돌은 유압식 성형기와 자동 오토로다, 언로다, 완전자동 무인 큐빙을 설치해 보다 질 좋은 제품을 생산, 공급하고 있습니다. 완전 자동화된 기계 설비를 갖추고 우수한 품질, 정확한 규격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1986년 수동기계로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객만을 생각하며 과감한 투자와 연구를 거듭한 대덕벽돌의 모든 생산제품이 KS인증을 받았으며 현재는 원적외선 제품에 연구, 투자하고 있습니다. 수용자 여러분의 만족을 보람으로 여기며 국내 건설업계의 사랑받는 동반자로 성공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대덕신협 이사장을 거쳐 시의원에 당선, 활동하고 있는 이진화 대표는 “인류의 모든 공간을 보다 쾌적한 공간으로 창조하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대덕면의 학교
    
대덕중학교
대덕면 관기리 777번지에 위치한 대덕중학교는 1969년 10월 14일 설립 인가를 받아 1970년 3월 6일 첫 입학식이 거행됐으며 2015년 현재 제43회에 걸쳐 3천764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대덕초등학교
대덕면 관기리 235번지에 위치한 대덕초등학교는 1929년 5월 9일 4년제 대덕공립보통학교로 개교돼 1941년 대덕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94년 3월 1일 대덕국민학교 가례분교장, 연화분교장, 내감분교장에 이어 1995년 3월 1일 문의분교장이 통합됐다. 1996년 3월 1일 대덕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2015년 현재 제84회에 걸쳐 5천197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상 上(위 상), 象(코끼리 상)

후 厚(두터울 후), 후 猴(원숭이 후)

 

산내들님 옆지기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산내들님은 선처사상(先妻思想)이 투철하십니다. ㅎㅎ

독립군님 이 글도 명심하세요.酒中不語眞君子, 財上分明大丈夫. (주중불어진군자, 재상분명대장부.) 술 취해서도 말 없음은 참다운 군자요, 재물에 대하여 분명함은 대장부이다. 명심보감 정기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

 

잰틀맨님 안녕하세요.늘 관심을 가져주셔 감사합니다. 귀촌하여 생활할 집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집의 명창을 고심하고 있는데요. <金, 鄭이 쉬면서 즐기는 곳, 휴락산방(休樂山房>으로 하고저 하는데요. 어떠세요?

 

 

金, 鄭 쉬면서 즐거움이 가득한 곳

 

휴락재(休樂齋),

 

휴락산방(休樂山房)

 

정(亭)

 

당(堂)

 

용과 영이 쉬면서 즐기는 곳

 

 

 

 

휴심(休心) 걱정이 없이 마음을 편안(便)히 가짐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짐

 

휴(休),  풍류 락(樂).

집,방 재(齋)

정자, 집 정(亭)

집 당(堂)

집 옥(屋).

산방(山房) 산촌에 있는 집의 방, 서재를 이르는 말

 

 

 

 

내시경 검사

 

 

 

 

 

 

 

身外無物,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가장 귀합니다.

건강은 모든 인생살이의 기초입니다.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시며

밝은 표정으로.......

마음 느긋하게.......

배풀며.......

끊임없이 배우며.......

건강 100세를 넘자 !!

 

2019년 3월 17일

태화산우회  Bravery 드림

 

 

 

 

 

 

 

 

 

 

 

 

 

 

 

 

 

 

 

 

 

 

 

 

 

 

 

 

 

 

 

 

 

 

 

 

 

 

 

 

 

 

 

 

 

 

 

 

 

 

 

 

 

 

 

 

 

 

 

 

 

 

 

 

 

 

 

 

 

 

 

 

 

 

 

 

 

 

 

 

 

 

 

 

 

 

 

 

 

 

 

 

 

 

 

 

 

 

 

 

 

 

 

 

 

 

 

 

 

 

 

 

 

 

 

 

 

 

 

 

 

 

 

 

 

 

 

 

 

 

 

 

 

 

 

 

 

 

 

 

 

 

 

 

 

 

 

 

 

 

 

 

 

 

 

 

 

 

 

 

 

 

 

 

 

 

 

 

 

 

 

 

 

 

 

 

 

 

 

 

 

 

 

 

 

 

 

 

 

 

 

 

 

 

身外無物,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가장 귀합니다.

건강은 모든 인생살이의 기초입니다.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시며

밝은 표정으로.......

마음 느긋하게.......

배풀며.......

끊임없이 배우며.......

건강 100세를 넘자 !!

 

2019년 3월 17일

태화산우회  Bravery 드림

 

 

 

 

 

 

 

 

 

 

 

 

 

 

 

 

 

 

 

 

 

 

 

 

 

 

 

 

 

 

 

 

 

 

 

 

 

 

 

 

 

 

 

 

 

 

 

 

 

 

 

 

 

 

 

 

 

 

 

 

 

 

 

 

 

 

 

 

 

 

 

 

 

 

 

 

 

 

 

 

 

 

 

 

 

 

 

 

 

 

 

 

 

 

 

 

 

 

 

 

 

 

 

 

 

 

 

 

 

 

 

 

 

 

 

 

 

 

 

 

 

 

 

 

 

 

 

 

 

 

 

 

 

 

 

 

 

 

 

 

 

 

 

 

 

 

 

 

 

 

 

 

 

 

 

 

 

 

 

 

 

 

 

 

 

 

 

 

 

 

 

 

 

 

 

 

 

 

 

 

 

 

 

 

 

 

 

 

 

 

 

 

 

身外無物,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가장 귀합니다.

건강은 모든 인생살이의 기초입니다.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시며

밝은 표정으로.......

마음 느긋하게.......

배풀며.......

끊임없이 배우며.......

건강 100세를 넘자 !!

 

2019년 3월 17일

태화산우회  Bravery 드림

 

 

非氣之弟와 같은 남우회 친구들이여.......

身外無物,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가장 귀합니다.

건강은 모든 인생살이의 기초입니다.

밝은 표정으로.......

마음 느긋하게.......

배풀며.......

끊임없이 배우며.......

건강 100세를 넘자 !!

 

남우회 친구들과의 만남은

머릿속에서 그냥 기억으로만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속 깊이 남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매달 매달 만나는 남우회 친구들과의 만남. 

기다리고 설레며 추억을 쌓아가야 합니다.

  

 

 

 

 

 

 

 

 

 

 

 

 

 

 

 


 

 

 

 

모장

 

[ ]

절세의 미인 이름. 춘추시대 월왕()이 총애하던 여인. 전한 원제( )의 후궁에 있었던 왕소군()의 본명이 왕장()이어서 그녀를 말한다고도 함.

鹿(모장여희 인지소미야 어견지심입 조견지고비 미록견지결취 ; 모장은 고운 여인이니 사람이 보고는 아름답다 하지마는,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에 깊이 잠기며 새가 보고는 높이 날고 고라니가 보고는 마구 달려가 숨어 버리더라.-이는 사람과 짐승이 처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장자 내편 제물론>
西 (금유각본수석도일 기정화불가득견 이법도삼연상존 약모장서시 노유여태야 ; 지금 각본의 수석 그림 한 점이 있는데, 그 정화는 얻어 볼 수 없으나 법도는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어, 마치 모장이나 서시가 늙어도 맵시가 남아 있는 것과 같더라.)<신숙주 화기>

[네이버 지식백과] 모장 [毛嬙] (한시어사전, 2007. 7. 9., 국학자료원)

 

 

 



 

 

 

 

 

 

 

 

 

 

 

 

 

 

 

 

 

 

 

 

 

 

 

 

 

 

보약삼척(補藥三貼)이 불여(不如) 추일등산(秋日登山)보약 세첩 먹는것 보다 가을날에 등산하는 것이 낫다.

 

 

 

 

 

 

 

 

 

 

 

 

Nature is the best physician

자연은 가장 좋은 의사다

 

 

 

 

 

 

 

 

 

 

먼우금이란  옥련동, 동춘동, 청학동, 연수동을 관할하는 면(面)을 말 하였다.

먼오금인데 발음하기가 편리한 먼우금으로 바뀐 것이라 애기하기도 한다.

 다리오금을 모으면 오른쪽과 왼쪽 무릎 사이는 한 뼘도 떨어지지 않지만 오른 쪽 무릎의 피가 왼쪽으로 가려면 심장을 반듯이 거쳐 멀리 돌아야 한다.

 

인천시 연수구(문학면)과 남동구(남동면)사이에 깊은 갯골이 있어 남동면까지 걸어서 가려면10리이상의 갯골을 돌아가서 걸어가야만 되고(갯골에서는 서로 손을 흔들고 인사도하고 하지만),배로가면 4내지 5분이면갈수 있었다. 그래서 가깝고도 멀다는 뜻에서 먼우금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이곳 갯벌에는 실뱀장어, 농어, 망둥어, 숭어가 많이 잡혀 시간가는줄 모르고 낚시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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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우금 이란  (0) 2005.08.10